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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사학과 학사 학위논문 - 한국인이 인도국민군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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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ce나그네
댓글 0건 조회 1,332회 작성일 16-10-31 00:22

본문

<토론 주제>
1. 한국인이 인도 국민군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가?
2. 한미 동맹은 한국이나 미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굳건할 것인가?

<토의 주제>
1. 한국은 어떤 조건에 처했을 때 미국과의 동맹을 포기할 수 있는가?
2. 한미 동맹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인가?

아래 글은 본 글의 저자가 사학과 학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글입니다. 졸업논문으로만 쓰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글이라
어떻게 만들어진 글인지 경위를 밝히고 인터넷에 게재합니다. 그냥 게재했다가 표절 문제가 걱정되어 http://libguides.khu.ac.kr/turnitin를 가지고 해외 자료까지 포함해서 표절률을 검사해보고자 했으나 방도를 찾지 못해 https://lite.copykiller.co.kr/로 대신 검사했습니다. 표절률은 8%가 나왔고 결과확인서도 다운받아서 확인해 본 결과 본 저자가 참고하지 않은 글의 문장과 우연히 일치하거나, 참고자료 목록에 넣은 자료 정보를 의심 문장으로 잡는 듯해서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추후 이와 관련된 문제가 있을 시는 이 모든 것은 본인의 책임임을 밝힙니다. 카피킬러를 처음 써보는 것이라 앞으로 더 쓰면서 카피킬러가 무엇을 기준으로 표절과 표절이 아닌 것을 판단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짜 적절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래 졸업 논문 본문을 복사합니다. 시험해본 결과 따로 각주 표시를 하지 않는 이상 한글 파일을 이곳에 복사하기만 해서는 본문 각 문장에 달린 각주는 여기에 복사되지 않았습니다. 각주 표시를 다 해놓은 원본 한글 파일은 일부 개인정보를 삭제하고 ㅇ 올립니다. 그리고 아래 복사한 글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글의 특성상 졸업 논문 원문에서 일부 개인정보 등은 삭제하고 올림을 밝혀둡니다. 석/박사 학위논문, 학술지 논문 등은 그 학술성이나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학사 학위논문이 그렇다고는 생각이 안 들어서, 학부생들도 본인 노력 여하에 따라 지금보다는 더 많은 제도적 인정을 받기를 희망하는 마음에 이 글을 올립니다.

<알림 :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아래 글은 경희대 사학과 학사 학위논문으로 제출된 글이며,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이상 원문의 흐름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약간 손을 봤음을 밝힙니다.>

2차 대전 후 인도는 왜 인도 국민군을 보호했는가?







1. 서론


한국 역사학계에서 주로 다루는 지역은 유럽-미국과 동북아시아이다. 인도는 아시아에 속하니 동양사에 포함이 되지 않느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의 동양사는 주로 한중일 3국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고,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소홀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어려운 시점에, 일본과는 관계가 좋아지려고 해도 식민지 시기의 경험을 포함한 여러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 선택지를 보다 폭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


인도는 중국에 필적하는 인구를 가진 세계 유일의 대국이면서도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빠른 경제 성장 속도를 보이면서도 청년층 비율이 높기 때문에 잠재성도 풍부하다. 아울러, 비록 한국에서의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중미 사이에서 한국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인도 근대사를 연구할 때는 주로 마하트마 간디를 필두로 한 비폭력 저항 운동에 주목하거나, 식민지 경험을 공유한다는 공통점을 떠올리고 31 운동을 우호적으로 바라본 인도인 지도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점만 놓고 인도를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이다. 일본이 동북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음에도, 당시 인도에서는 일본을 우호적으로 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 군사 지도자들이 전범 재판을 받았지만, 인도와 일본이 이어가고 있는 우호 관계는 단순히 지정학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협력 관계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2차 대전 당시 수바스 찬드라 보세라고 하는 인도인 지도자가 있었다. 간디가 주도하는 비폭력 운동에 참가하면서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으나, 영국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는 길은 무력 항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은 간디-네루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2차 대전에서 추축국의 힘을 빌려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겠다는 계획을 실행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풀어야 할 의문점이 있다.


일단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왜 무력 항쟁을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마하트마 간디의 끈질긴 비폭력 저항 운동이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서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냈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무력 항쟁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 사실이 인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에도 그동안 한국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 무력 항쟁 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수바스 찬드라 보세이다. 그는 적의 적은 동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 일본의 도움을 구하고자 했다. 인도에서 이를 문제 삼는 사람들도 많았고, 영국 입장에서도 반역자란 낙인을 찍기에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역사에 기록되었다. 왜 그랬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군대는 인도 국민군이고, 이 군대는 동남아시아의 인도인 사회에 기반을 두고 일본과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한 이후 전범 재판을 통해 일본군 지도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짚어야 할 부분은 승전국이었던 영국이 인도 국민군에 참여한 사람들을 재판하고 반역죄라고 판결까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도 국민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곧 인도를 독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도 국민군 재판 과정에서 수많은 인도인들과 국민회의가 피고의 편에 섰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루의 경우는 보세가 파시스트의 편에 섰다는 비난도 했고, 간디의 경우에도 비폭력 노선을 저버리고 영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과 함께하기 어려웠지만, 국민회의의 여러 지도자들이 인도국민군을 변호하고자 재판정에 섰다. 또 인도 국민군이 인도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도인의 손에 인도인이 죽는 사태가 불가피했을 텐데도 영국 해군에 복무하던 인도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영국이 웃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발생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김구와 여운형 등이 암살되는 등 구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인도의 사례는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해외에서는 위에 제기한 문제를 연구한 사례가 꽤 여럿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위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거나, 인도사의 일부분으로 단행본 등에서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본 논문을 통해 한국에서도 인도 독립 운동사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통해, 인도와 국제 관계의 본모습을 직시하고,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우호 관계를 넓혀가는 데 본 논문이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2. 본론


(1)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왜 무력 항쟁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에 대한 무력 항쟁은 선택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산발적으로 테러나 지하 무장 조직들의 활동은 있었으나 영국의 지배는 확고했고 인도는 계층별, 지역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인도국민회의는 처음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돕고자 설립되었고, 지도자들은 농민이나 노동자 등 하층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에 대한 저항 운동을 시작하면서 인도 민족 문제는 범국민적 차원의 일이 되었고, 영국 당국이 대처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간디는 차우리 차우라 사건을 겪고는 저항 운동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했고 비폭력 비협력 운동을 중단했다. 이 때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간디의 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 후 영국 식민 당국은 간디에게 혐의를 적용해서 투옥시켰고 구심점을 잃은 인도 독립 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비폭력 비협력 운동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이 생겨났다.


보세도 그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간디가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다음에도 그는 인도 국민회의의 일원으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의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의장으로서 재선을 노리면서 간디 및 네루와 충돌을 빚었다.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정치적 반대파들의 압력을 받아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에 의해 구금당하는 처지가 되자, 보세는 인도 국내에서 영국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인도를 탈출해서 인도 독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세력을 찾기 시작했다.







(2)무력 항쟁 과정에서 그는 왜 추축국의 도움을 구했는가?


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탈리아와 미국의 사례를 연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강력한 식민 통치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의 적은 동맹이라는 논리를 이용해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인도 국민회의에서는 추축국이 영국의 적임에는 분명하지만 파시즘이라는 정치 체제 때문에 그들과 손잡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렇다고 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가 롤라트 법으로 돌아온 경험 때문에 영국의 전쟁 수행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울 입장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영국은 인도인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강제로 참전시켰다. 그래서 인도 국민회의는 간디의 주도 하에 '인도를 떠나라'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보세는 이미 인도에 없었다.


보세의 활동과 관련해서 제기되던 우려 중 한 가지는 영국을 인도에서 몰아낸 다음 추축국들이 배신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보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일본에게 속은 마지막 인도인이 될 것이라고 간디에게 전했다. 하지만 이렇게만 얘기해서는 그 우려를 잠재울 수 없다. 그리고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인도 내에서 일본을 믿을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보세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일본이 인도의 적 영국과 동맹이었을 때는 일본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먼저 했다. 그리고 중국은 영국·미국과 손잡음으로써 인도의 적이 되었고, 일본은 아시아인의 연대를 얘기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기에 인도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또 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지도자 도조가 필리핀, 미얀마 등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약속했기에 일본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까지도 했다. 나중에 가서 보세는 필리핀과 미얀마가 독립 국가가 되었다는 증언을 하면서 일본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보세의 시각에 대해 몇 가지 비판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인도가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추축국과 손을 잡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중국이 자신의 영토를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국과 손을 잡는 것이 부당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과 전쟁을 하면서 중국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명분만 내세우면 중국은 자동적으로 일본과 대화에 나서고 친선을 도모해야 하는가라는 거북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점으로는, 일본이 러시아를 격퇴하면서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일본이 타이완, 류쿠, 조선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얘기는 쏙 빼놓고 있다. 보세가 추축국의 도움을 받기로 한 이상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해서 정치적으로 좋을 것이 없었다는 점은 감안할 수 있다. 또 인도인들이 영국에 대항해서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추축국의 입장을 변명할 필요도 있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보여줬던 행적은 추후에 추축국이 세계 대전에서 승리했을 경우 인도(수정 전 오타 : 일본)에서 되풀이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세는 그의 발언에서 이 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지만,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보세는 영국의 강력한 힘에 맞서기 위해서는 추축국이라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인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을 이루길 원한다면 결국 인도인들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인 전쟁포로들을 데리고 군대를 만들었고 일본과 교섭을 해서 상당한 자율권을 얻어냈다. 전쟁에서의 기여도를 인정받아 독립을 주장할 명분을 쌓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인도를 분리해서 통치한다는 전략을 택하고 있었고, 보세가 인도국민군을 통솔하던 당시에는 인도에서는 인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힌두교도들과 무슬림연맹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도들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인도국민군 내에서는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시크교도가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서로 협력하고 있었다. 보세는 자신의 군대로 영국을 몰아내고, 자신의 군대를 모델로 전 인도인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단결하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인도를 보호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보세가 사망한 후, 영국이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시크교도 들 중에서 각 1명씩 3명의 장교를 대표로 재판에 회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국민군은 인도 본국과 비교했을 때 종파 간 협력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해 당대의 인도인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보세가 동북아 사정을 알았든 몰랐든 관계없이, 일본이 설령 배신하더라도 인도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보세는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의 사례를 보면서 독립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으나 결국 자주적인 국가를 이룩했던 건국의 아버지들에 주목을 했다. 그는 이것이 정치가들의 현명한 외교 전략 때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사례들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프랑스와 기타 여러 국가의 원조 덕분에 미국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영국은 여전히 최강국이었고, 유럽 내에서의 세력 균형 관계는 유지되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한 것은 맞지만 이탈리아가 독립한 다음에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각각은 세력을 유지하면서 균형을 이루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누가 전쟁에서 이기든 국제 세력의 균형추가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컸다. 보세는 인도국민군을 처음 조직할 때 추축국의 패배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이 패한 다음에도 미국과 소련이 유럽의 패권을 놓고 다투느라 태평양 전쟁까지 개입할 여력은 없을 것이고 인도국민군은 소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연합국이 내부 문제를 종전 후에 해결하기로 하고 힘을 합치면서 보세의 예상은 빗나갔다. 물론 인도는 독립을 이뤘지만 보세가 계획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추축국이 이겼다고 가정할 경우,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여전히 버티고 일본을 태평양에서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영국은 이미 독일의 본토 폭격과 잠수함을 통한 해상 봉쇄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인도까지 상실한다는 것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했다.


설령 추축국이 이겼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인도가 독립국으로 서기 위해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펼 수 있는 가능성은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연합국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던 영국은 인도의 지원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독일의 본토 폭격과 잠수함을 이용한 해상 봉쇄 때문에 영국은 이미 피폐해져 있었고 인도의 상실은 여기에 쐐기를 박을 가능성이 컸다. 인도국민군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해군력의 우위를 이미 점했기 때문에 미국은 스스로를 보존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추축국의 승리는 미국이 최소한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이 패배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인도를 돕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다. 설령 소련이 인도를 도왔다고 해도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동부 유럽 국가들을 위성 국가로 만든 것을 보았을 때 인도의 독립이 가능했으리라는 보세의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시점에서 당시를 가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보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분명히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영국 식민 통치가 강고하던 상황 속에서 인도 독립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인 영국이 적과 싸우기 위해 동맹이 필요하다면, 하물며 약자인 자신들이 영국이란 적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동맹이 필요하지 않겠는가라는 논리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야 할 질문은 여전히 남았다. 보세는 그의 선택이 피를 부를 것이라는 것을 몰랐는가? 여기서 피를 흘려야 할 사람은 인도국민군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보세 밑에서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도로 진격할 경우 영국 식민 정부 하에서 복무하고 있던 인도인 병사들의 목숨과,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민간인 피해는 고려하지 않았나? 설령 인도 독립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고 해도, 인도인이 인도인을 죽이는 상황은 나중에 인도 본국 사람들이 보세와 인도국민군에게 증오심을 품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인들은 실제로 피를 흘렸다. 보세는 이것이 영국의 잔학한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다친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누가 그랬든 결국 죽는 것은 인도인들이었고 보세는 이 문제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를 희생시켜 대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던 셈이다. 보세가 시작한 전쟁으로 인도인들이 겪게 될 피해보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하면서 끼치는 해악이 더 크다는 판단 하에서 말이다.








(3)인도국민군은 왜 패하고도 인도인들에게 구원받았는가?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했다. 일본과 손을 잡고 싸웠던 인도국민군도 인도에서 패퇴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보세는 소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으나 비행기가 추락한 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본과 독일의 지도자들은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영국은 여전히 인도를 식민 통치하고 있었고 인도국민군은 반국가 집단으로 여겨졌다. 법대로라면 반역죄와 적국과 내통한 죄가 적용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입장에서도 그 수많은 인원을 모두 재판해서 처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국민군 수뇌부 중 장교 셋을 뽑아 본보기를 보이기로 했다.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시크교도들 중에서 각각 한 명 씩 선택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 생전의 보세와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면서 그의 강경 투쟁 노선을 비판했던 간디와 네루 등, 국민회의 지도부가 인도국민군을 변호하겠다고 법정에 선 것이다. 그리고 인도 국민들이 인도국민군의 석방을 식민 당국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인도국민군이 인도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도인들이 희생되기도 했고, 식민 당국에 맞선다는 것은 경찰들의 진압과 감옥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는데도 말이다. 왜 그랬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이고, 그 후 인도국민군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우선 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간디·네루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인도국민회의에서 의장으로 재선되기도 했고, 간디가 주도하는 비폭력·비협력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도인들로부터 꽤 신망 받던 지도자 중 하나였다. 비록 실각하기는 했지만, 보세의 강경 투쟁 노선에 동조하던 인도인들이 꽤 많았다는 것을 뜻했다.


인도에서 탈출한 이후, 그가 보여준 행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먼저 독일로 가서 추축국에 포로로 잡혀있던 인도군인들을 조직해서 인도로 진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에만 몰두하느라 인도로 진격하고자 하는 보세의 계획을 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럽에서 U보트를 타고 인도양에서 일본 잠수함으로 갈아탔고, 결국 아시아로 건너가는 데 성공했다.


사실 보세가 동남아시아에 가기 전 이미 그곳에 인도 국민군이 조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인도 국민군을 지도했던 인사는 간디의 비폭력 비협력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인도를 떠났었고, 그래서 인도 젊은이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과 맺은 개인적 관계가 너무 긴밀했고, 또 당시 인도국민군이 일본의 지원에 의지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속성이 너무 심했다. 이 때문에 인도로 진격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기는커녕 내부 분열로 인해 인도국민군이 사실상 해체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인도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도 지도했고 독일과 일본을 오가면서 전설적인 행보를 보였던 보세가 동남아시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거주하던 인도인들이 보세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보세는 일본 수뇌부와 면담해서 인도국민군의 지휘를 자신에게 맡길 것을 요청했고, 동남아시아의 인도인 사회로부터 인도국민군 유지를 위한 비용을 상당부분 충당하여 독립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살던 인도인들은 보세가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으면서도 영국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다.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인도를 떠난 이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영국은 인도 지도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인도를 다시 전쟁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미 1차 대전 때 영국에 협력했다가 롤라트 법이라는 쓰디쓴 보답을 받고 비폭력·비협력 저항 운동을 벌였던 인도 국민회의는 다시 간디를 중심으로 ‘인도를 떠나라’라는 운동을 벌였다. 폭력만 쓰지 않았다 뿐 사실상 영국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반란을 선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단 영국은 이미 간디가 이전에 벌였던 비폭력 비협력 운동들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전과 또 달랐던 점은, 인도국민회의가 영국으로부터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다면 무슬림 연맹은 자신들의 분리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먼저라고 하면서 힌두-무슬림 갈등이 이미 심각해졌던 것이다. 또 간디의 비폭력 비협력 운동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영국이 끝까지 버티면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대중에게 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할 만한 성과도 없고 또 간디는 폭력이란 선택지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를 떠나라'란 운동에서 간디는 영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방치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식민 당국을 상대로 전면적인 폭력 투쟁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어찌됐든 간디뿐만 아니라 운동을 지도했던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다시 감옥에 갇혔고, 간디는 단식을 다시 시작했다. 간디의 단식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발생한 공황 상태에 대처하고자 영국은 건강상의 이유로 간디만 풀어줬다. 그러면서, 영국은 인도 근처까지 진격해온 일본군의 위협과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인도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하지만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영국의 명분은 약해져갔다. 하지만 영국은 여전히 인도를 독립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인도 지배를 위해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을 여전히 이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보세와 인도국민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세는 인도 국민회의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인도 국민회의의 전통을 상당부분 계승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종교를 뛰어넘은 민족 대단결을 주장했는데,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이끄는 인도국민군내에서는 힌두·이슬람·시크교도가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서로 단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선언하면서도, 간디에 대한 존경심을 공개석상에서 표명하는 등 인도국민회의에 여전히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 때문에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국민군을 평하기를 '숭고한 동기와 독립에 대한 열정을 지녔으나 방향을 잘못 잡아 아쉽다'고 했다. 또 인도국민군의 명분이 인도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쳐 반영 반제국주의 운동을 더욱 강화시켰다고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봤을 때, 인도 국민회의가 단순히 공개석상에서 인도국민군을 논평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왜 재판정에서 그들을 변호하기까지 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무시할 만한 이유는 많았다. 인도국민군과 일본군의 인도 진격으로 인해 영국이 그들을 억압할 명분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 군국주의·전체주의자들과 협력했고 전쟁 과정에서 인도인들끼리 서로 싸워 희생자가 나왔다는 데서 도덕적 명분을 깎아먹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보세가 간디·네루 등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인도를 떠났다는 데서 인도 국민회의가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국민회의는 보세의 인도국민군을 품었다. 단지 인도국민회의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들이고 포용력이 넓어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당시의 정치 역학적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수 힌두 교도를 대표하는 인도 국민회의와 소수 무슬림을 대표하는 무슬림 연맹 중 대중에게 보다 강하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던 쪽은 무슬림 연맹이었다. 인도가 하나의 국가로 독립했다고 가정했을 때,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할 경우 표 대결에서 힌두 교도들이 압승할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인도국민회의의 네루는 무슬림 연맹에 정치적 양보를 약속했다가 파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진나가 입장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힌두 교도들은 믿을 수 없는 배신자들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루를 필두로 한 인도 국민회의가 주장했던 것이 강력한 중앙 정부에 기초한 중앙집권제였지 무슬림들의 자치를 보장하는 연방 분권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 연맹은 다수 힌두교도들의 종교적 억압이라는 문제를 꺼내들기 좋았다. 인도 국민회의의 경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고 통일된 인도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1940년대에 인도 국민회의가 거둔 실적이 미미했다. '인도를 떠나라' 운동은 영국의 지능적인 대처로 침체기를 맞이했고, 운동을 주도했던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체포되던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또 운동을 시작하면서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들이 내각 총사퇴를 감행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무슬림 연맹이 메우면서 정치적 역학관계가 인도 국민회의에 보다 불리해졌다.


쉽게 말해서, 인도 국민회의는 무슬림 연맹에 대항해서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기폭제가 필요했다. 위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인도국민군을 이용해서 힌두 교도들과 무슬림들이 한 국가를 이루고 살아야 하고, 또 영국에 대항하자는 명분으로 인도국민군이 보여준 행적을 이용해서 선전할 경우, 인도인들의 감정에 강하게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죽었다는 사실이 이 일을 행하기 더 쉽게 만들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인도 국민군을 구한다는 것은 보세의 정치적 복권을 돕는다는 뜻이고, 독립 후 정치적 지분을 배분해야 할 때 강력한 경쟁자를 제 손으로 불러들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죽었기 때문에,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국민군을 옹호하는 것은 보세에 대한 추모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보세로부터 인도 국민회의로 인도 독립이란 대의명분을 가져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공식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파시스트들과 협력한 책임은 보세에게 떠넘기고, 그 밑의 사람들은 열정만 넘쳐서 잘못된 지시를 수행했다는 식으로 변호할 수 있다는 속내였으리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런 계산도 해야 했으리라.


인도국민군이 인도에 끼쳤던 또 다른 영향으로는, 왕립인도해군의 반란을 꼽을 수 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제국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인도 군인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간디가 비폭력 비협력 노선을 채택하고, 인도 민중을 규합하면서 인도 독립 투쟁의 새 역사를 썼지만, 군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때도 영국은 상당히 많은 수의 인도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도 국민군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면서 군인들까지도 영국을 상대로 투쟁하게 되었다는 데 왕립인도해군 반란의 의의가 있다. 이 때문에 영국은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 인도 문제에 대처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이 인도인 지도자들과 독립을 위한 협상을 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혹자는 여기서 영국이 이미 자치권 부여를 약속했고, 또 2차 대전 이후 이미 독립한 국가들이 있기 때문에 어차피 인도국민군이 아니었어도 인도는 독립했을 것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알제리, 베트남 등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유럽 열강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패전국 독일과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들은 1차 세계대전의 선례를 따라 독립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승전국들의 식민지는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는 한 포기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또 인도 국민회의가 비폭력 비협력 노선에 따라 결국 협상을 거쳐 독립을 했기 때문에 인도국민군은 기여한 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그들이 주창했던 무장투쟁 노선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인도를 떠나라'는 운동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인도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간의 갈등을 적절하게 식민 통치에 이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국민군 재판과 왕립인도해군의 반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불러온 보세와 인도국민군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판에 회부되었던 인도 국민군 장교들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판결은 집행되지 않고 장교들은 석방되었다. 사실 독립한 후에도 영국과 경제적 의존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도는 영연방에 남아 있었고, 파키스탄과 인도는 상대가 영국이라는 강대국과 보다 친해질까 걱정하면서 영국과의 존재를 좋게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영국 입장에서도 인도를 독립시키기로 한 마당에 인도 국민군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인도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도 국민회의가 이들을 변호하고자 재판정에 선 마당에 독립한 인도 정부가 이들을 법률적으로 보호할 가능성도 컸다. 즉 영국 입장에서는 반역자이지만 신생 인도에서는 이들 또한 자국민이기 때문에 영국은 재판을 끝내서 체면을 세운 후 적당한 선에서 빠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또 인도 국민회의도 인도국민군 변호를 통해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이들을 다시 무시했다.







(4)지금까지 다룬 내용은 한국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활동할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미국, 중국, 영국 등 연합국의 도움을 받아 광복군을 조직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유럽에서는 독일,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위협을 당하면서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인도국민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인도 국민회의가 주도한 '인도를 떠나라'란 운동이 영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즉 2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인도의 독립 운동과 한국의 독립 운동은 서로 직접적으로 맞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적대 관계에 있었던 셈이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이 인도국민군과 일본군에 의해 인도를 상실했다고 한다면,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인도가 영국 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봤을 때 전쟁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랬다면 이미 일본 식민 통치 하에서의 자치를 주장했거나, 더 나아서 일본 제국 내에서의 참정권과 일본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요구했던 한국인 지도자들이 한반도 내에서 점점 더 늘어났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한국의 독립은 더욱 어려웠을 공산이 컸다.


인도와 한국의 독립 운동의 주요 특징을 맞비교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단 무장 투쟁을 하거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던 민족 지도자들은 해외로 빠져나가서 외국의 도움을 받아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도의 경우에는 수바스 찬드라 보세와 인도 국민군, 한국의 경우는 김구와 한국광복군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수바스 찬드라 보세의 경우 인도 국내의 주요 정치 세력이었던 인도 국민회의가 공식적으로 영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던 반면, 한국의 경우 국내에 남아있던 민족 지도자들 중 일본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항의 기치를 내 걸만한 정치 세력이 없었다. 지하 조직으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면서 자치를 주장하거나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영국과 인도 사이의 거리가 워낙 멀고 인도가 영국 본국에 비해 워낙 인구도 압도적으로 많고 땅이 넓은 나라였기 때문에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인도인들의 협력이 많이 필요했으나, 일본과 한국은 상당히 가까웠고 일본이 더 인구나 영토 면에서 더 큰 나라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보다 직접 통치를 시행하기가 쉬웠다는 측면이 있다. 땅이 넓고 다양한 종교·계층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영국은 일단 인도 내부의 분열을 이용해서 식민 통치를 하는 데 성공했고 인도인 협력자들을 다수 만들어내는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일단 간디 등과 같이 다양한 종교·계층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오고,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이 기반 위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자, 간디와 보세를 둘 다 무력화시키고 2차 대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영국도 인도인들의 저항을 이겨낼 수는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는, 유교 문화에 기초한 중앙집권국가가 지배하던 곳이기에 일단 일본이 확실하게 장악하기는 어려웠다. 신분 간 갈등이 심각했고, 또 중앙 정부가 제 역할을 못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 내 정치 세력 간의 분열을 이용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한일 병합을 도운 친일파들이 상당한 세력을 이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일본이 초기 식민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일단 문화 통치를 통해 친일 세력을 키우고 군부 독재를 통해 저항 세력을 숙청하자 한반도 내부에서는 공개적인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제에 대한 협력이 주류 문화가 되었고, 인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적·민족적 단일성을 보였던 한반도는 이 주류 문화에 저항할 만한 힘을 국내에서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울한 얘기지만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지 않았다면, 또 해외로 탈출해서 독립 운동을 계속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한반도 내부에서 독립 운동의 지분을 주장할 만한 세력은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3. 결론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수바스 찬드라 보세와 인도 국민군은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강력한 열의를 보여주었지만, 잘못된 길로 갔다는 간디의 평이 당시 상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국민군을 구했고 한국에서는 독립 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하에서 김구, 여운형 등이 피살되었다는 점에서 두 나라의 정치적 수준이 달랐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국민군을 구한 이유는 결국 무슬림 연맹이라는 정치적 반대파에 맞서 독립 후 인도의 지분을 늘리고자 하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물론 재판에서 인도국민군을 변호하면서 영국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계속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 국민회의 사람들을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은 아니다. 이 점을 상기하는 데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결국 분리 독립을 했고 이를 막고자 했던 간디가 암살되었다는 사례만 제시해도 충분할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간디와 인도국민회의에 치우친 한국의 인도 독립 운동 연구에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의 경우 인도의 무장 투쟁에 주목할 만한 역사적 요소가 충분했다. 국내에서 자치를 주장했거나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친일파로 간주했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식민지 경험을 공유했던 국가들의 역사를 연구할 때 무장투쟁에 초점을 맞출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디와 같은 비폭력 비협력 투쟁에 그동안 역사 연구의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은 다음 요소들 때문이라고 본다.


일단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한국 무장 독립 투쟁 세력의 적이었던 일본과 협력했고 일본이 전쟁에서 졌기에 이 사실에 주목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을 수 있다. 인도와 한국이 식민 통치의 아픔을 공유했고 3·1 운동과 사티아그라하를 통해 비폭력·비협력 정신을 공유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2차 대전 당시 보세라는 인도의 거물 민족 지도자가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적들과 손잡았고 또 인도 국민회의 사람들과 인도 대중이 인도국민군을 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 당시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가 계층·종교간 갈등을 넘어서서 영국에 대한 저항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 이들의 정치적 자본은 인도의 민족 자본가 계급에 기반하고 있었다. 즉 민중을 저항의 주체로 인정하면서도, 부르주아의 지도를 받고 일정한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인도 국민회의에서 노선 갈등과 권력 투쟁을 겪고 나서 파시스트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반공주의와 사회 질서 유지를 강조하던 한국 사회에서 보세에 주목한다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간디와 네루의 인도 국민회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한국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유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본 논문을 쓰면서 아쉬웠던 점은, 사실 해외에서는 수바스 찬드라 보세에 대한 연구가 상당 부분 진척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본 논문은 국내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측면을 상기하는 의의는 있어도, 역사 연구에 있어서 진실로 새로운 시각을 창출해내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인 역사가의 입장에서라면, 당시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보세와 인도 국민군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했는지, 또 일본에 협력하던 한반도 내 정치 세력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수바스 찬드라 보세가 한국 근현대사에 어떤 시사점을 남기는지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도사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본 논문은 보세 단 한명에게, 그것도 그가 행했던 수많은 반영 투쟁 행적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분에만 주목했는지라 전후 관계를 상당 부분 생략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2차 대전 당시에 보세가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인도 국민회의 인사들에게 전한 메시지에 대해서는 다량의 1차 사료를 검토했으나 인도 국민회의 인사들이 2차 대전 당시에 보세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사료 조사나 해석이 미진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 보세와 인도국민군이 오늘날 인도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 등을 파고들지 못함으로써 본 논문의 저술 목적을 완전히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남는다.


전반적으로 본 논문을 쓰기 위해 참고했던 1·2차 사료의 양은 상당히 많았으나 표피적 수준의 해석에 머물렀고, 같은 사건을 놓고 다른 해석을 보이는 사료들 가운데서 옥석을 가리거나 사료의 이면을 파고드는 노력은 부족했다. 본 저자의 한계로 돌리면서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행해지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1)논문


①이지은, '일본 군정기 말라야의 인도 민족주의와 이주 인도인 사회, 1941-1945', 남아시아사연구 제19권 1호, 2013, pp. 147-190


②Green, L. C., 'The Indian National Army Trials',The Modern Law Review, 1948, Vol.11(1), pp.47-69 [Peer Reviewed Journal]


③WILLIAM F. KURACINA (2010). 'Sentiments and Patriotism: The Indian National Army, General Elections and the Congress's Appropriation of the INA Legacy.' Modern Asian Studies, 44, pp 817-856


④Peter Heehs, 'India's Divided Loyalties', History Today, July, 1995, Vol.45(7), pp.16 - 23 [Peer Reviewed Journal]


⑤Cohen, Stephen P., 'Subhas Chandra Bose and the Indian National Army', 1964, Pacific affairs, Volume: 36, Issue: 4, 411-429





(2-1)단행본 - 1차 사료 모음집


①‘Selected Speeches of SUBHAS CHANDRA BOSE', S.A. AYER, Publications Division Ministry of Information and Broadcasting Government of India, 1992


②'The Indian Nationalist Movement - 1885~1947 - Select d_ocuments', B.N.Pandey, The Macmillan Press Ltd, 1979


③‘Subhas Chandra Bose', Dr. Girija K. Mookerjee, Publications Division, 1992




(2-2)단행본 - 2차 사료


①‘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E.M.S. 남부디리파드, 정호영 옮김, 한스컨텐츠, 2011


②‘인도사 108 장면’, 박금표, 민족사, 2007


③‘인도 근대사 16세기~20세기’, 퍼시벌 스피어, 이옥순 옮김, 신구문화사, 1993




(3)인터넷 자료


①신영우 지음, 인터넷 뉴스부 편집, '두 인도인, 해괴한 논리로 한국의 가슴에 못 박다', 충북일보, 2013-05-21,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87774#null


②신영우 지음, 조혁연 편집, "리콴유 전총리 '일본군은 영국군보다 더 잔혹하고 난폭'", 충북일보, 2013-05-28,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88914


③정규득, '<다시 손잡는 인도-중국> ④양국 사이 파고드는 일본', 연합뉴스, 2006-11-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468880


④신영우 지음, 인터넷 뉴스부 편집, '한중에 스파이 파견…도둑 측량으로 지도를 만들다', 충북일보, 2013-06-04,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290139


⑤권홍우, '[만파식적]인도-일본 신 밀월의 뿌리', 서울경제, 2014-09-02,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1409/e20140902212602131870.htm


⑥김기협, "일본을 이용해 조국 '해방'을 꿈꿨던 사람들", 프레시안, 2011-09-19,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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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 빠뜨리고 벼락치기로 몰아서 몇 개 올리는 챗 GP…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2024년 6월 12일 아침 …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2024년 6월 10일 정리 …
미국 연방 대법원 주요 결정 2024년 6월 9일 정리…
프랑스 헌법재판소 (Le Conseil constitu…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주요 결정 2024년 6월 9일 정…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2024년 6월 9일 정리 결…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2024년 6월 6일 정리 결…
2024년 6월 1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주요 결정 정…
2024년 5월 30일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정리 …
2024년 5월 27일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정리 …
2024년 5월 2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주요 결정 …
2024년 5월 23일 대한민국 법원 주요 판결 정리 …
(펌글)법무부, ′24년 1차 불법체류 외국인 정부합동…
(펌글)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율 89.2%로 ‘18년보다…
조규홍 본부장 주재 중앙사고수습본부 제31차 회의 개최…
(펌글)장애인고용공단-아이티센그룹 ‘자회사형 장애인표준…
(펌글)신직업 및 유망산업 분야 현직자의 생생한 취업 …
(펌글)인공지능(AI) 시대의 청년취업, 「고용24」와…
(펌글)(참고) 고용률ㆍ경제활동참가율 3월 기준 역대 …
(펌글)(설명) 환경부는 기후적응법 제정을 추진한 바 …
(펌글)국립공원 암벽장 55곳 합동 안전점검
(펌글)(동정) 제2의 볼티모어 교량 충돌사고 대비한다
(펌글)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대문 화면
(펌글)2024.4.12. 대한민국 법원 대국민서비스 …
(펌글)발코니 벽 해체에 아랫집 소송···대법원 "위험…
(펌글)전세금 돌려준다 속이고 점유권 이전한 집주인, …
[펌글]국적 잃을뻔한 다문화 남매...대법 "주민등록증…
[펌글]2024. 4. 10. 각급법원(제1,2심) 판…
2022년 12월 9일(금)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회…
2022년 12월 2일(금)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회…
2022년 11월 28일(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
2022년 11월 22일(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
2022년 11월 17일(목)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
2022년 11월 12일(토)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
2022년 11월 7일(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회…
2022년 11월 4일(금)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회…
2022년 10월 17일(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
2022년 10월 10일(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
(토론실 사이트 펌글)IDS X KIDA Korea 2…
2022년 9월 24일(토), 25일(일) 일기(다이어…
(토론실 사이트 펌글)IDS X KIDA Korea 2…
2022년 9월 21일(수), 22일(목), 23일(금…
2022년 9월 20일(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회…
2022년 9월 19일(월) 일기(다이어트, 청취력 회…
(토론실 사이트 펌글)IDS X KIDA Korea 2…
2022년 9월 17일(토), 18일(일) 일기
2022년 9월 18일(일) 일기(체중변화 기록, 20…
(토론실 사이트 펌글)IDS X KIDA Korea 2…
2022년 9월 15일(목), 16일(금)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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