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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한잔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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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절로
신라의 고찰 백련사가 있다.
억겁의 세월을 지키고 선 나무들 사이로
백련사를 향하는 오솔길이 있고
그 길 양편은 다산 선생의 삶과 애환을 알고 있는
노송들이 서 있다.
다산 초당은 초당을 중심으로 동암과 서암이 있다.
초당에 들어서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추사 선생의 글을 모아서 만든 현판이다.
동암은 다산 선생이 초막을 짓고 거처하시면서
은거하였던 곳으로 송품암이라 한다.
선생은 이곳에서 초의스님을 제자로 삼고
가르침을 베풀어<동다송>이란 다풍을 이루었는데
그 차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童子仙茶. 담원 김창배.
아침 일찍 일어나 참선을 마치고
누각에 올라앉아 마시는 향기로운 차 한 잔
다산 선생은 이렇게 초당에서 차를 즐겨 마시며
유배세월을 보냈다.
차를 늘 곁에 두고 친한 친구처럼 소중한 애인처럼
여겨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억울한 한을 이겨내고
이곳 초당에서 수백 권이 넘는 방대한 책의 기틀을 잡았다.
다산 선생은 공재(恭齋) 윤두서의 외종손으로
그의 외가가 유명한 화가의 집안이었다.
그래서 선생도 회화적으로 뛰어났지만 실학자라는 명망에 눌려
그의 서화 예술은 거의 묻히게 되었다.
지금껏 전해지는 선생의 서화 작품은
그림이 백여 점 정도 있으며
글씨는 수백 점에 이른다.
다산 선생은 유달리 차를 좋아해서
거의 모든 화제는 차에 관한 것이었다.
어쩌면 선생과 나는 비슷한 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그리는 나 역시 모든 그림 속에
다관과 찻잔이 있으며 화제 또한
차와 관련된 글을 즐겨 쓴다.
서산에는 달이 떠 담백한데
밤에는 차를 달이며 소나무 바람을 쏘인다.
다산 선생은 유배가 끝날 무렵 20여명의 제자들과 차 마시기를
지속적으로 할 요량으로 차회를 자주 열었다.
이름하여 "다신계" 가 탄생한 것이다.
이 모임은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신의와 의리를 잊지 않고
좋은 인연을 맺자는 일련의 계모임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배를 마치고 경기도 광주의 마현 고향집(여유당)
에서 다산학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오늘날 다성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를 있게 한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 역할을 분명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하신 것이다.
"내가 능히 다산에 돌아가지 못하니 마치 죽은 삶과 같구나."
하는 구절이 있다.
이만큼 다산 선생은 유배지인 초당을 그리워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다산 선생이 그곳에 있으면서 찻잎을 쪄서 말린 떡차가 있는데
절에서 만들었다하여 이를 만불차(萬茶)라 한다.
또한 민중의 차인 황차를 계승 발전하여 다산 선생의 이름을 따서
정차(丁茶)라 기록에 전해져 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생은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이
보내준 차를 함께 즐기며 많은 저술을 남기시다
1836년 일흔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담원 김창배의 "茶한잔의 풍경" 중에서......
끓는 물 솔바람 소리. 담원 김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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