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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엽차를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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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에 손님이 오거나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잔의 차를 끓여 마실 때가 있다.
그런데 같은 물을 끓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학이나 정치가에 있어서 굳이 차와 비교하라 한다면
한 편의 시와 같은 경우는 작설차라 하고
정치는 깨끗한 정치가라 할수도 있다.
소설은 커피라 하고 정치가는 자기 직분에만 충실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수필은 송엽차와 같거나 정치에 있어선 애국자라고 말한
어떤 선지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설차는 약간 쓴 맛이 나면서 입안에 향내가 베어들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정치가나 속된 혀로는
이 차의 맛을 가려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차 그릇 또한 이조 백자나 고려 청자와 같이
그 품격을 지녀야 어울리지 그저 범속한 것은
작설차의 멋과 맛을 버리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작설차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적어도 십년 정도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커피는 너무 대중적이다.
한 두번 마셔보면 그 맛을 대략은 알게 될 뿐 아니라
커피 그릇도 작설차 처럼 가릴 필요가 없고
유리잔에 받아 마시거나 혼자 마셔도 좋고 연인과 다정히 마셔도 좋다.
한잔의 커피와 같은 정치인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게 된다.
어떤 격식이나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커피는 누구에게나 쾌감을 준다.
커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만큼 통속적인 것이다.
학식이 높고 낮음에 구애받지 않고 연령이나 성별에 제한이 없고
흥미나 말초신경에 자극만 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만큼 시류에 영합하고 부정과 부패와 비리와 같은 일에도
쉽게 젖어들 뿐만 아니라 또 많이 마시면 위장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커피에 비해 송엽차는 담담한 맛이다.
비록 설탕을 넣지만 달지 않고 솔잎을 넣지만 텁텁하거나 떫지 않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맛본 뒤에야 그 맛의 신비함을 느낄수가 있다.
젊은이나 풋나기와 같은 사람은 송엽차의 오묘함을 모른다.
그러니까 수필은 송엽차와 같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아늑한 맛이며 아름다운 멋을 지니고 있다.
애국하는 정치가 또한 그렇다.
나라를 먼저 사랑할 뿐 아니라 부정이나 부패와 비리에 대한 단호함에는
설익은 설교가 통하지 않는다.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지 않을 뿐더러 책임 정치를 위해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고 찾아가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섣부른 정치인이나 철학은 수필의 참 맛을 방해한다,
오래 묵은 포도주 처럼 결이 삭은 후에야 우러나오는
슬기와 시간의 지혜 속에서 훌륭한 수필은 송엽차 처럼 샘 솟는다.
수필은 얕은 체험담이 아니다. 값싼 지식은 더욱 아니다.
시나 소설은 젊고 신선한 감각으로 쓸 수 있지만
수필은 봄 여름을 다 지난 뒤 가을쯤 되는 연륜에 접어 들어야
보이기 시작하는 무게와 깊이를 지니고 있다.
수필에 만약 색갈이 있다면 그것은 가을 하늘 빛이다.
티끌 한점에도 얼룩이 지는 맑은 표정에서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를 느낀다.
수필은 얕은 지식이나 꼬부라진 언어로 다루는
기교처럼 쓴 잡다한 산문이 아니다.
애국하는 일에 어찌 조건이 필요할 일인가?
그러므로 관조의 눈으로 본 철학적 사고의 틀에서 짜내는
산문적인 시가 곧 수필문학이다.
그러므로 수필에서는 모과향내가 베어 있어야 한다.
모과를 방에 모셔 두면 책에서도 옷에서도 그윽한 모가 향내가 나듯이
수필에서도 사색의 맑은 향기가 베어 있어야 하고
또 고고하면서도 소박한 맛이 스며 있어야
수필다운 맛을 찾아 읽을 수가 있다.
애국하는 정치인 역시 그 삶의 과정을 들어다 보면
시나 소설 같은 것이라기 보다 수필같은 삶의 감동적인 향기가 베어 있다.
그리고 송엽차에서 은근하게 향내가 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을 살았다는 흔적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
물울 끓여서 적당하게 식힌 후 따온 솔잎을
깨끗하게 씻어 넣고 설탕을 적당하게 뿌린 다음 밀봉하여
그늘진 곳에 일주일 정도 삭혀서 개봉하면
우리 민족 구성원만이 느낄 수 있는 송엽차가 된다.
물과 솔잎과 설탕과 기다림이라는 설래임의 시간이
함께 빚어 만들어 내는 과정이 수필의 세계이다.
지식과 직관과 기다림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대~한민국이라는 한편의 향기 높은 수필은 태어난다.
수필이란 담담하지만 무미건조해서는 안 된다.
시적인 취향이 있어야 하지만 시처럼 난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설같은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통송적이어서는 안 되고
철학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아야 한다.
송엽차는 솔잎이라는 까칠한 지성과 물의 무기교가 주는 맛과
그 시간과 설탕이라는 쾌감이 한데 어울려서
한잔의 차로 승화되는 수필이다.
이산 저산을 기웃거리며 또 선거철이 돌아 올 때 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찾는 것 처럼 나와 조국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알맞는 송엽차를 빚어 함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진정한 정치 지도자가 어디에 있는지
그런 소박하고 애국을 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싶다.
한잔의 차를 끓여 마실 때가 있다.
그런데 같은 물을 끓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학이나 정치가에 있어서 굳이 차와 비교하라 한다면
한 편의 시와 같은 경우는 작설차라 하고
정치는 깨끗한 정치가라 할수도 있다.
소설은 커피라 하고 정치가는 자기 직분에만 충실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수필은 송엽차와 같거나 정치에 있어선 애국자라고 말한
어떤 선지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설차는 약간 쓴 맛이 나면서 입안에 향내가 베어들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정치가나 속된 혀로는
이 차의 맛을 가려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차 그릇 또한 이조 백자나 고려 청자와 같이
그 품격을 지녀야 어울리지 그저 범속한 것은
작설차의 멋과 맛을 버리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작설차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적어도 십년 정도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커피는 너무 대중적이다.
한 두번 마셔보면 그 맛을 대략은 알게 될 뿐 아니라
커피 그릇도 작설차 처럼 가릴 필요가 없고
유리잔에 받아 마시거나 혼자 마셔도 좋고 연인과 다정히 마셔도 좋다.
한잔의 커피와 같은 정치인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게 된다.
어떤 격식이나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커피는 누구에게나 쾌감을 준다.
커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만큼 통속적인 것이다.
학식이 높고 낮음에 구애받지 않고 연령이나 성별에 제한이 없고
흥미나 말초신경에 자극만 주면 그만인 것이다.
그만큼 시류에 영합하고 부정과 부패와 비리와 같은 일에도
쉽게 젖어들 뿐만 아니라 또 많이 마시면 위장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커피에 비해 송엽차는 담담한 맛이다.
비록 설탕을 넣지만 달지 않고 솔잎을 넣지만 텁텁하거나 떫지 않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맛본 뒤에야 그 맛의 신비함을 느낄수가 있다.
젊은이나 풋나기와 같은 사람은 송엽차의 오묘함을 모른다.
그러니까 수필은 송엽차와 같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아늑한 맛이며 아름다운 멋을 지니고 있다.
애국하는 정치가 또한 그렇다.
나라를 먼저 사랑할 뿐 아니라 부정이나 부패와 비리에 대한 단호함에는
설익은 설교가 통하지 않는다.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지 않을 뿐더러 책임 정치를 위해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고 찾아가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섣부른 정치인이나 철학은 수필의 참 맛을 방해한다,
오래 묵은 포도주 처럼 결이 삭은 후에야 우러나오는
슬기와 시간의 지혜 속에서 훌륭한 수필은 송엽차 처럼 샘 솟는다.
수필은 얕은 체험담이 아니다. 값싼 지식은 더욱 아니다.
시나 소설은 젊고 신선한 감각으로 쓸 수 있지만
수필은 봄 여름을 다 지난 뒤 가을쯤 되는 연륜에 접어 들어야
보이기 시작하는 무게와 깊이를 지니고 있다.
수필에 만약 색갈이 있다면 그것은 가을 하늘 빛이다.
티끌 한점에도 얼룩이 지는 맑은 표정에서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를 느낀다.
수필은 얕은 지식이나 꼬부라진 언어로 다루는
기교처럼 쓴 잡다한 산문이 아니다.
애국하는 일에 어찌 조건이 필요할 일인가?
그러므로 관조의 눈으로 본 철학적 사고의 틀에서 짜내는
산문적인 시가 곧 수필문학이다.
그러므로 수필에서는 모과향내가 베어 있어야 한다.
모과를 방에 모셔 두면 책에서도 옷에서도 그윽한 모가 향내가 나듯이
수필에서도 사색의 맑은 향기가 베어 있어야 하고
또 고고하면서도 소박한 맛이 스며 있어야
수필다운 맛을 찾아 읽을 수가 있다.
애국하는 정치인 역시 그 삶의 과정을 들어다 보면
시나 소설 같은 것이라기 보다 수필같은 삶의 감동적인 향기가 베어 있다.
그리고 송엽차에서 은근하게 향내가 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을 살았다는 흔적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다.
물울 끓여서 적당하게 식힌 후 따온 솔잎을
깨끗하게 씻어 넣고 설탕을 적당하게 뿌린 다음 밀봉하여
그늘진 곳에 일주일 정도 삭혀서 개봉하면
우리 민족 구성원만이 느낄 수 있는 송엽차가 된다.
물과 솔잎과 설탕과 기다림이라는 설래임의 시간이
함께 빚어 만들어 내는 과정이 수필의 세계이다.
지식과 직관과 기다림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대~한민국이라는 한편의 향기 높은 수필은 태어난다.
수필이란 담담하지만 무미건조해서는 안 된다.
시적인 취향이 있어야 하지만 시처럼 난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설같은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통송적이어서는 안 되고
철학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아야 한다.
송엽차는 솔잎이라는 까칠한 지성과 물의 무기교가 주는 맛과
그 시간과 설탕이라는 쾌감이 한데 어울려서
한잔의 차로 승화되는 수필이다.
이산 저산을 기웃거리며 또 선거철이 돌아 올 때 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찾는 것 처럼 나와 조국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알맞는 송엽차를 빚어 함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진정한 정치 지도자가 어디에 있는지
그런 소박하고 애국을 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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