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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성황후 목에 칼들어 온던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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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불현듯 조선말기 민족의 수난 현장, 역사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역사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암튼 평소에 보고싶었던 명성황후 뮤지컬을 봤습니다.
명성황후하면 그간 연속극, 근대 역사 인물, 뮤지칼, 소설 등으로 우리국민 모두에게 애환의 슬픈 역사로 가슴 속 깊게 자리 메김하고 있다 봅니다.
역사는 정확하게 인식해야하는 이유는 아픈 역사일 수 록 잊지 말고 반추하여 다시는 그런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1895년 10월 8일)에 일본의 전권공사(미우라) “여우사냥”이라는 작전을 꾸며 일본 자객을 조선 황실로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뮤지컬은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조명해주고 있더군요.
당시 조선 주변의 열강들은 패권쟁탈전, 일본의 조선 찬탈에 명성황후가 가장 장애물임을 간파하고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고 대동아 공영이라는 작업을 추진하였고
이처럼 11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침탈과 일본의 만행을 그린 명성황후 뮤지컬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느껴집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이며, 살인죄로 일본으로 소환된 미우라와 그의 일당은 재판장의 심문에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무죄 석방하는 장면 등은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할 장면이 아닙니까?(생각할 수록 분통터져...)
열강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목록

소외된사람님의 댓글
소외된사람 작성일
미우라 - 미워라!
자고로 칼을 쓰는자는 칼로 망 할것이다.
(그 칼은 녹이 많이 슬고 이빨 빠진 식칼이쥐...한번 찔려봐! 마이아파!)◀ 상상요망

토돌이님의 댓글
토돌이 작성일
참고자료: 명성 황후는 어떤 인물인가?
1. 명성 황후(明成皇后/1851 - 1895)의 생애
조선 고종의 비, 16세 때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의 비가 되었다. 대원군이 역대의 세도 정치를 근절할 목적으로 가문이 외롭고 단출한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택하였 으나, 1873년에 왕자 척(拓)을 낳은 후 명성황후의 친족이 정권을 잡으려 했으나 대원군이 이를 막기 위하여 궁녀 이씨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양자의 싸움에 명성황후는 드디어 대원군을 탄핵하고 고종으로 하여금 직접 정사를 돌보도록 한 후, 끝내는 대원군 일파를 모두 쫓고 나라의 문을 열어 일본과 수교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도움 을 청해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게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다시 청나라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김홍집 등의 친일파가 정권 을 잡게 되자 러시아 힘을 배경으로 세력을 펴 친일파의 세력을 물리치려 하다가 1895년 을 미 사변 때 일본 공사 미우라의 부하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1897년에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내렸다.
2. 명성 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는 20여 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 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뿌리부터 흔들리 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 란 , 갑신정변, 동학농민 운동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극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어찌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 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 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 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보출처 : http://home.cein.or.kr/~younggnn/data/history/history5gundai/h5-5-1.htm)

오정숙님의 댓글
오정숙 작성일정말 너무하네요 사람 죽어놓고 저런 배짱을 내놓다니... 우리 후손 대대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아니 잊으면 안되는 그런 사건이죠...

강승진님의 댓글
강승진 작성일우리도 언젠가 천황의 아내를 시해할것이다..두고봐라 일본 x바리들...

언니님의 댓글
언니 작성일
저는 제목보고 칼같이 튀어들어왔는데..조회수가 조금실망적이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