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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Re..만약,1979년에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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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은 바로 하란' 말이 있다.
박정희의 공은 2정도 나머지 8이 폐해이다.
새마을운동도 윤보선 시대에 이미 만들어진 것이고
농업 경공업 중공업 서비스업 순서도 경제발전 원리이고
타국에서 받은 돈도 재벌에게만 혜택을 주었고, 나중에 국민의 혈세로 메우고 있다.
당시에 경제호황기로 누가 하던 박정희보다 잘 했을 것이다!
독재자는 독재자일 뿐,
아직도 독재의 그늘이 좋다고 하는, 어둠의 그림자들이 있나 보다.
권력에 빌붙어 부정부패의 혜택에 물들은 자들은,
독재자 시절 역사 왜곡이라도 하고 싶겠지.
국민이 바보는 아니다.
이제 알 것은 다 아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 ( 퍼 온 글 )------------------------------
만약,1979년에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인혁당','5.16 군사 쿠데타' 등에 관한 발언으로 언론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에 출연해 박 후보는 "(유신과 5ㆍ16의 경우)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만약에 내가 지도자였다면, 이런 입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생각하며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며 "그런 부분은 객관적으로 역사가 판단해 나아가지 않겠나. 그것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후보는 특히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셨다"며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은 박근혜 후보의 말과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박정희가 과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떳떳했던 인물인지, 그가 죽었던 1979년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각자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79년, 그 암울했던 경제 상황'
박정희를 일컬어 산업화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칭찬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럴 순 있습니다. (그 당시 독재자들이 어느 정도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웠던 시대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러나 그가 죽었던 1979년을 보면 산업화의 장본인, 경제 성장의 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 1979년 6월4일자 동아일보 기사
1979년은 서민을 비롯한 자영업자, 중소기업 모두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6월인데도 벌써 '물가 연말억제선'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1979년 5월 도매 물가는 10.5%,소비자 물가는 12.3%의 상승률을 기록해 정부가 정해놓은 물가억제선 도매 10%, 소비자 12%를 모두 넘었습니다.
1978년은 식료품가격이 올라 물가인상으로 서민이 고통받았다면, 1979년은 수입원자재와 공산품까지도 가격이 올라, 소상공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979년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2차 오일쇼크가 왔던 요인도 있지만,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까지 올라가 버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바로 부동산 투기로 인한 빈부격차가 최고조로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는 1979년 토지가격을 무려 49%나 급등하게 했고, 이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의 인력을 대거 도시로 끌고 와 나라 경제를 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그의 정권 통치기간 내내 소모품으로 살면서 일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고, 도시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박정희의 산업화가 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재벌만을 위했던 그의 경제 정책입니다.
1979년 대한민국 제조업 출하액을 보면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통해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1961년부터 잘살아보세를 외쳤지만 18년 동안 재벌만 잘살았던 것입니다.)
재벌은 특혜 금융을 통해 자신들의 재산은 늘렸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 사회 빈부의 격차를 늘려놓았습니다. 아직도 박정희의 산업화 때문에 잘살게 됐다고 믿는 사람을 보면 '당신이 아닌, 재벌이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당시 경제는 재벌을 위한,재벌만의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1978년에 발생한 삼성조선의 '산업스파이'사건, 삼성조선은 대한조선공사의 설계도와
기밀 서류를 빼돌리다 적발됐다.출처:1978년 4월17일자 동아일보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당시 재벌들이 정부 보증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상위 5대 재벌이 되느냐 10대 재벌이 되느냐가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재벌들이 자기 자본 없이 무조건 정부의 금융특혜로 기업을 키웠는데, 당시 중화학산업의 평균자기자본비율은 22%에 불과했고, 1979년 5월은 총투자규모의 30%가 투자 보류 내지는 중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재벌이 정당하게 기업 활동을 했다면 박정희의 산업화가 인정을 받았겠지만, 정치자금을 내고 금융 특혜를 받으며, 기술력보다는 비리를 통해 재산을 늘리면서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 재벌의 모습은 독재국가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에 불과했습니다.
▲ 1965년부터 1983년까지의 물가지수. 출처:통계청
1970년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물가는 점점 가면 갈수록 서민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경제 성장률은 1976년 14.1%,1977년 12.2%였다가 1978년 9.7%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1979년 경제성장률은 6.5%였고, 국가채무는 200억 달러를 넘어 국가부도 사태까지 제기될 정도였습니다.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어도, 그는 결국 국가 경제의 부도로 하야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 1979년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박정희의 죽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1979년 '부마항쟁'입니다. 이 부마항쟁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재 여부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통치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부마항쟁을 김영삼 제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YH무역 여공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YH무역이 공장문을 닫아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들이 쫓겨 나와 간 곳이 신민당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정치를 통해 유신독재의 경제정책 결과인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가 야당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경찰진압과정에서 숨진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을 절대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산업화를 칭송하는 이들은 당시 배부른 돼지는 서민이 아닌 재벌뿐이었고, 대한민국 노동자와 서민은 굶주림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절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필자가 앞서 1979년 경제 상황을 말한 이유는 박정희가 만든 경제허상의 실체를 국민이 인식하고 반발하는 시점이 1979년이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영상의 제명 이후 불거진 부마항쟁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독재 상황도 중요했지만, 당시 대다수 국민의 삶이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봐야 합니다.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재벌과 박정희 산업화의 노예로 전락했던 국민이 경제허상을 자각하고 일어서는 시점에서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단순히 위수령과 비상계엄령 등의 무력통치로 진압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것이 그동안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본질에서 차원이 다른 사태라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 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의 증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학생데모가 아닌 민란으로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만약 10.26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물가고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발생한 부마항쟁의 끝은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고, 이는 4.19처럼 박정희가 하야하는 사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김재규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아마 광화문 네거리는 피바다가 됐을 것이고, 무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차지철을 통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학살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197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으로 정치자금 모으기, 언론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유신체제를 위한 사법 살인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권을 국민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고, 이는 그가 죽음으로 끝이 났었을 뿐입니다.
' 박정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가 유신을 종식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를 판단한다면, 박정희는 결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권이양을 하겠다던 박정희의 기자회견,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해부터 국민에게 거짓말을 누차 반복했던 독재자였습니다. 군사혁명정부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떠나겠다고 했지만, 그의 말은 채 1년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습니다.
○ 혁명정부가 사용했던 복지국가
지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내거는 공약 중에 복지국가, 경제 민주화가 있습니다. 그 말의 어원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혁명정부 기자 회견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복지국가라는 말을 항상 사용했는데, 그가 복지를 "국민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제생활에 국민이 그들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유신체제에서 국민의 기본인권이 지켜진 적이 있습니까? 인혁당 사건만 봐도 명백한 사법살인이었습니다. 고문과 투옥,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나라,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노동자들은 분신자살과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복지를 내세우며 혁명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복지국가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억압과 독재, 인권 유린의 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됐으며,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인간의 자유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후보 라디오 연설에서 "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 인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1971년 대통령 담화에서는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떠드는 사람이 추앙하는 박정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가 언제라도 박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러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박정희는 형법에 국가원수 모독죄를 제정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 이번이 마지막?
박정희는 군사쿠데타가 끝나자마자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당당히 국민앞에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뻔뻔하게 대통령 선거에 계속 출마했습니다.1971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 관련 기사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후보 유세연설에서 "이번에 또다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 총통제를 만들어 박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하련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여러분에게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둔다."라며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해 6년 연임제를 통과시키고,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5선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이라고 외쳤던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마지막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내 재산이 문서로 발견되면, 그 돈을 도시의 판잣집을 기와집으로 고치거나 농민들의 영농자금에 쓰도록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10.27일 전두환은 합수부를 통해 박근혜와 함께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금고2'를 열었고, 여기에서 자기앞 수표 1천만원짜리 수십장, 5백만원짜리 수십장등 9억5천여만 원과 박근혜,박지만,박근영의 적금 통장을 별견했습니다.
전두환은 현금 6억 원은 박근혜에게 줬고, 비자금 장부와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집무실에 있던 '금고1'은 박근혜가 챙겼다고 하는데, 과연 그 돈이 얼마인지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필자가 지금 이 나이에 박정희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9살 어린 나이 때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비밀 안가에서 젊은 여자를 안고 술마시다 죽은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공과를 말하면서 그를 칭송하며 역사의 판단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점을 그의 공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재벌과 독재자를 위해 밤을 새우며 미싱을 돌린 대가가 '배고픔', '인권유린','자유의 억압과 탄압'이었는데 무엇을 칭송해야 합니까?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1991년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분석한 책 '네 마리의 용'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북한의 위협으로 만든 사회적통합과 훈육된 인력, 국가에 대한 인식,엄청난 교육열을 손꼽았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18년간의 독재자였다는 말뿐이었습니다.
▲ 박정희와 전태일 열사 묘비,출처:인터넷
1979년 박정희가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줄 가능성이나 독재를 끝내겠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短氣:‘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를 품에 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국민 대다수가 참고 참다가 마지막으로 일어설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을 어떻게 진압했을지는 뻔합니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다 죽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누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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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만취상태서 반란군 지휘
5.16 군사반란은 박정희가 술을 상당량 마시고 지휘한 '취중 쿠데타'였다. 거사 시점으로 잡은 5월16일 0시가 되기 2시간 전 준비상황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를 서너 대접이나 마셨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거의 만취상태였으며 당시 전화 통화한 장도영이 그의 발음에서 취기를 느낄 정도였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박 장군, 지금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고 내일 얘기하자"고 말했다. 쿠데타라고 해도 주모자가 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거사에 나선 것이 아니라 초조감과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는 행태였다. 그것은 '구국의 결단'이나 '역사적 혁명'을 감행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될 수 없었다. 이른바'구국의 혁명'이라는 주장과는 턱 없이 거리가 멀었다.
1961년 5월 말 예편 예정 알고 술타령 깊어져
1961년 1월부터 육군본부는 군 장성 인사작업에 착수한다. 장성급에 대한 인사자력표를 놓고 평가작업이 벌어졌다. 인사자력표 중에서도 군 정보수사기관이 제공하는 보안심사자료가 가장 중요했다. 과거 사상이 의심스러운 전력이 있거나 근무 평가가 나쁜 장성 수십 명이 예편 대상자로 정해졌으며 여기에 박정희도 포함됐다. 이들은 그해 5월 말 예편하게 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박정희는 화풀이로 술을 더 자주 마시면서 군사반란 의지를 다졌다.
오랫동안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잘 될 리 없었다. 자연 불만이 쌓여가니 음주량도 늘어만 갔다. 불평분자의 알콜 중독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처음 쿠데타를 생각한 것은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 때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 측이 저항하면서 정치적 혼란상이 벌어진다. 6.25 전쟁 통에 피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니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는 참으로 국민의 고난과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이승만은 야당 인사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령과 함께 군대 동원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을 확고하게 반대하면서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일로 이종찬은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군내에 신망이 높았고 일본군 계열이 아니라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이때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대령 신분인 박정희가 이종찬을 찾아간다.
"각하, 군이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군사혁명으로 나라를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의 권력욕에 대한 반감으로 정의로운 행동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박정희의 첫 정치군인 행보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은 5.16 직전의 장도영과 달리 태도가 분명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나라를 망치는 거 몰라 그래? 대통령의 군 동원 명령에도 내 직을 걸고 반대한 건 그래서야."
이종찬은 박정희의 쿠데타 주장이 그저 독재자의 전횡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줄만 알았다. 박정희의 마음 속 깊이 군사반란과 정권찬탈에 대한 망상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박정희가 그런 흉계를 남몰래 키우고 있는 암적 정치군인이라는 사실을 이종찬이 간파했더라면 그냥 물리치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박정희의 입에서는 군사혁명 얘기가 수시로 흘러나왔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동기생인 이한림이나 장도영이 육참총장이 되기 전 자신의 직속상관으로 2군사령관일 때부터 군사혁명을 하자고 졸랐다. 그러나 모두가 핀잔을 놓으면서 그냥 흘려 넘기곤 했다. 가까운 장성들 사이에서 소외되자 박정희는 술과 벗을 삼으며 이런 저런 궁리에 빠졌다.
반란군 차질 빚자 청진동 술집에서 막걸리 세 사발 들이켜
"탄로났는데 가 본들 어떡하겠소, 한잔 하며 생각해 보자"
운명의 날로 잡은 5월16일 0시를 기다리던 15일 밤에도 박정희는 반란군의 행동계획이 초기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초조해 하면서 술을 마셨다.
15일 밤 9시반 경, 서울 신당동 박정희의 자택.
그는 운명의 거사를 하러 나가기 위해 채비하기 시작했다.
"임자, 거기 내 가방에 권총 좀 꺼내 줘"
부인 육영수도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육영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권총 벨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남편에게 건네준다. 육영수는 한 마디 했다.
"여보, 애들은 지금 학교 숙제를 하고 있어요."
"그래 …?"
박정희는 집을 나가면 그 후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들 방으로 갔다. 국민학생인 근혜와 근영이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하고 아직 유치원생인 지만은 누워서 잠 잘 준비다. 그는 말없이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막 나가려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거사 본부로 정해 놓은 6관구사령부 참모장인 김재춘 대령이었다. 밤 10시까지 6관구에 가기로 돼 있었다.
"그래, 김 대령, 내 지금 6관구로 갈 참인데 …"
"각하, 30사단에서 우리와 함께 일을 도모해 온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했습니다. 일이 탄로나서 큰일입니다. 33사단도 장도영 총장의 단속으로 병력 출동이 어려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여기 6관구사령부엔 지금 장도영 총장이 보낸 헌병대가 와 있습니다."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는 더 미룰 수도 없고 계획이 누설됐다면 진압군 보다 먼저 방첩대와 헌병대가 반란군 주모자를 체포하러 나설 것이다. 그가 집을 나서려는데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 장경순 준장(후에 공화당 의원, 국회 부의장 지냄)과 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3관구사령관 지냄)이 들어선다. 장경순은 4.19혁명 직후 박정희가 작전참모부장일 때 차장이었고 한웅진은 육사2기 동기생이다. 두 사람도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급히 박정희의 집으로 온 것이다.
"지금 신변이 위험하니 우선 피신해야 하겠습니다. 집에서 빨리 나가시지요."
박정희의 집 앞에는 이미 방첩대 지프차가 와 감시하고 있었다. 장도영의 명령만 떨어지면 체포할 태세다. 박정희는 한웅진과 같은 차를 타고 장경순이 다른 차로 방첩대 차를 교란하기로 했다. 한웅진은 박정희를 자신이 유숙하고 있는 청진동의 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박정희는 애가 탔고 또 장도영에 대한 원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방첩대 차를 따돌리고 뒤늦게 나타난 장경순은 박정희에게 반란군 지휘본부인 6관구사령부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미 탄로가 났는데 내가 가본들 어떡하겠소?"
"그래도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각하가 오시기를 기다릴 텐데요."
박정희는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두 가지 차질을 그대로 놔두고 밀어붙여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다른 핵심부대들은 예정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거사의 제1선봉부대인 박치옥의 공수단도 육본이 지시한 훈련에 참가 중인데 제대로 출동할 수 있을 것인지 …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고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박정희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대포나 한 잔 하면서 생각해 봅시다."
박정희가 앞서고 장경순과 한웅진이 뒤 따라서 세 장성은 청진동 골목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 술상이 나오자 박정희는 다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들이켰다. 술이 아니라 마치 냉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술에 만취한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을 지휘하는 모습은 여러 대표적 다큐멘터리작가들이 묘사해 놓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 온 군사권위주의 정권이 1990년대 초 종말에 다다르자 어두웠던 시절 제대로 쓰지 못했던 비화들이 봇물 터지듯 신문 방송과 출판가를 휩쓸었다. 독재정권의 힘이 빠질 조짐을 보이니 온갖 증언과 기록문헌들에 바탕한 정치다큐멘터리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다음은 김교식이 쓴 『제3공화국』(하서출판사 1993년2월 출간) 제2권의 기록이다. 김교식은 동양방송(TBC)의 장기 다큐멘터리 드라머'광복20년'을 집필해서 명성을 얻은 대표적 사극 작가다.
1961년 5월16일 0시.
그 0시를 박정희는 청진동의 어느 술집에서 맞고 있었다.
"각하,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정보로 봐서 이 여관도 결코 안전한 곳은 못 됩니다. 일단 여기를 나기시죠."
한웅진의 이같은 권유에 따라 박정희는 청진동 미화여관을 떠나 근처에 있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정희는 초조한 듯 꽤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 …
자정의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리도 거의 끊어진 듯했다. 박정희는 어지간히 마신 술에 취해 있었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작가는 그날 박정희의 만취상태에 대해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다음은 이영신의 대하정치실록 『격동 30년』(고려원 출판사 1992년5월 출간) 1권의 내용이다. 이 책은 이영신이 MBC의 정치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위촉받아 집필했다.
여관에서 나온 세 사람은 청진동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술상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마치 기갈들린 사람 모양으로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대폿잔을 비웠다.
… …
밤 11시30분, 청진동 대폿집.
박정희는 취했다. 취하자 그의 사고력이 한골수로만 파고 들었다. "쿠데타를 꿈 꾸어 오기 10년, 이제 거사하려는 마당에 탄로났다고 해서 내가 여기 앉아서 대폿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내 박정희는 결심을 했다. 취기 덕분이었다.
… …
박정희를 에워쌌던 장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정희의 거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입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할 정도로 심하게 술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 …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 후 그래도 나라가 바로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박정희가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박정희는 거사 예정시각인 0시가 지나면서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꿈 꾸어오기 10년여, 여기서 주저앉으면 이제 더 이상 기회도 없다. 5월 말이면 옷을 벗어야 한다. 실패하고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해봐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장성도 그를 따라 나섰다.
술에 취해 진압군 장교들 대기실로 잘못 들어가 위기일발
장도영 통화 "박 장군, 술 취했으니 내일 만나 얘기하자"
박정희 일행은 0시를 넘겨 6관구사령부에 도착했다. 반란군 핵심들은 김재춘 참모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육군본부와 사령관인 서종철(육사1기, 나중에 육참총장과 국방장관 지냄)의 명령을 기다리며 반란군의 동태를 지켜보던 사령부 참모들은 부사령관실에 모여 있었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적진에 해당하는 그 부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반란군 동지들은 안 보이고 낯선 중령 소령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것 아닌가. 박정희는 무언가 방을 잘 못 들어왔구나 느껴졌지만 내친김에 그 앞에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으로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소. 그러나 나라꼴은 보다시피 이게 되겠습니까. …
우리 군이 궐기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군이 나서서 제대로 혁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걸고 나섰습니다."
뒤따라 들어 온 김재춘, 오치성 대령 등 쿠데타 핵심들은 박정희의 양 옆에 서서 분위기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박정희의 입에서는 옆 사람이 역겨울 정도로 심하게 술 냄새가 풍기는 것 아닌가. 그제야 사태를 알아차린 반란군 핵심참모들은 재빨리 박정희를 에워싸고 나가 지휘부가 차려진 김재춘 참모장 실로 데려갔다. 이곳 사령부 지휘부에 육본의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체포당하고 말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한편 장도영은 육군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육군 방첩대장 이철희와 서울지구 506방첩대장 이희영에게서 쿠데타군 출동 움직임을 보고받는다. 급히 506방첩대로 간 장도영은 박정희의 위치부터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의 반란군 지휘부에 있는 박정희와 전화를 연결하게 했다.
"아니 박 장군,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요?"
"각하, 오늘의 거사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혁명군은 출동했고 서울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전화 목소리에서 진한 술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저렇게 술을 마신 상태에서 무슨 혁명을 한단 말인가. 장도영은 박정희를 달랬다.
"박 장군, 오늘은 술도 취한 것 같고 계획이 이미 알려져서 부대 출동을 내가 막았소. 그만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나하고 만나 얘기합시다."
"각하, 여러 부대에서 병력이 움직였습니다. 일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글쎄,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박정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장도영은 빈 전화기에 대고 "이번엔 정부쪽에 경고 정도만 하고 그만 둡시다."하면서 헛수고를 계속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월16일 이렇게 청진동 술집에서 시작해 79년 10월26일 궁정동 비밀술집에서 막을 내린 셈이다. 10.26 박정희 살해사건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궁정동 안가의 비밀연회장에서 벌어졌다. 박정희와 그의 최측근 권력자들이 함께 위스키를 마시는 자리였다.
상습음주 독재자 과민한 의심과 변덕으로 측근 고문 다반사
작은 불쾌감과 괘씸죄도 감정과민으로 가혹한 탄압사태 불러
물론 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될까. 그 개인적인 성정이 모진 사람일 경우 다른 여러 사람을 해칠 위험성은 크기 마련이다. 독재권력을 쥔 사람이 상습 음주자라면 어떻게 될까. 독재권력이란 총칼보다도 더욱 넓고 깊게 국민을 해친다. 특히 '술 취한'독재자는 심리상태가 불안정하고 기복이 심하며 측근까지도 신경과민일 정도로 의심하면서 변덕을 부린다. 박정희의 이른바 용인술이란 측근 부하들에 대한 의심과 변덕이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실세노릇을 하던 권력자 중 상당수가 그의 과민한 의심과 변덕에 희생을 당했다. 조그만 실언과 한 치의 불복종도 괘씸죄에 걸려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다.
1971년 10.2 항명파동으로 공화당의 핵심인물들인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이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내무장관 오치성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일사불란하게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1973년 3월 박정희의 군내 최측근이던 윤필용 수경사령관은 하루아침에 부정축재와 권력남용으로 몰려 구속되고 만다. 그도 여권 인사 몇몇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각하의 후계자를 골라야한다"고 말한 것이 괘씸죄가 됐다.
윤필용 사건이 실세들을 놀라게 하던 그 해 여름 박정희 정권 아래서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슬쩍 미국으로 도피한다. 언제 박정희나 다른 권력경쟁자들에 의해 희생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유신독재의 문제점들을 진술하기도 했으나 79년 파리에 여행 중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박정희의 속마음을 가장 잘 읽을 줄 아는 복심으로 불리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조차 퇴임 후 해외 도피를 위해 비밀리에 출국한다. 박정희가 측근 실세들을 차례로 처치하는 것을 보고 그 변덕이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향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의 보고에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설마 임자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달랬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변보장을 받고서야 귀국해 경기도 이천에서 대외접촉을 일절 차단한 채 야인으로 지냈다.
박정희의 변덕과 측근 징벌은 부메랑과도 같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한 권총 사살로 돌아갔다. 그것은 박정희의 용인술이 실패한 결정판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 때의 권력자들도 어느날 갑자기 몰락하는 박정희 1인 독재 아래서 그의 정치적 반대자와 비판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감시, 미행, 고문, 테러, 암살, 강제해직, 그리고 일상생활의 통제와 검열 … 전체주의 독재정권의 체제폭력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자행됐다. 체제폭력의 대명사는 1970년대 중후반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 정권이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의 가혹한 체제폭력은 세계언론에 의해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시사용어 사전에 등재됐다. 그러나 그 더러운 전쟁은 비델라보다도 박정희가 훨씬 앞선 선배로 60년대부터 시작됐다.
작은 불쾌감
댓글목록

....님의 댓글
.... 작성일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하라...그쪽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생각 되네요 근거가 대화록또는 녹취록이 아니라 개인이 집필한 소설일뿐 만취 했다는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문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러운 전쟁에 시달려야 했는가' 라는 구절도 거짓입니다. 유신시대를 겪어본 분들은 대다수가 '독재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나라와 맞먹는 선진국중 독재,전쟁과 같은 진통을 겪지 않고 성장한 나라는 없습니다.

삼무님의 댓글
삼무 작성일
그쪽이 태어나기 전이라 알지를 못하는 모양이네요.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하다가
군부구테타를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한 일이 거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