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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무소유(無所有)와 유소유(有所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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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이 책을 쓰신 법정스님이 입적하셨지요..
지식인들이 지금 '무소유'란 책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과
법정 스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무소유를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철학토론 주제로 '무소유'를 올립니다.
무소유에 대한 개인 각자의 자유로운 의견을 교환해 주시고
현실의 문제점을 찾아 비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책 제목: 무소유
인생의 참 진리를 전하는 법정 스님의 대표작!

지나치게 소유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법정 스님이 전하는 깨우침의 이야기 '무소유'
법정 스님의 이야기에 담긴 삶의 지혜는 종교를 넘어서
우리의 삶에 깊숙이 닿은 일상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이 책은 법정스님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 쓴 지적 통찰의 글을 하나로 묶어서 소개한다.
☞ 북소믈리에 한마디!
법정 스님은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서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여러 저서들에서 얻어진 인세를 전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
정작 자신이 중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절에서 빌려 써야 할 정도였다.
'말하고', '행하는' 것이 일치했던 법정 스님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더욱 가치 있는 법문으로 다가온다.
무소유 독후감 소개 첫번째 글
인터넷 검색 자료
"소유는 범죄이다"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입니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 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 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p24)
무소유 ...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한 아름다운 말입니다. 구름 위에 집을 짓는다...
아름다운 표현일 뿐이지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무소유의 삶을 산다고 가정해 본다면 과연 이 땅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파멸이 오지 않을까 생각 듭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p23)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산다면 평화가 아닌 원시적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법정 스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그러나 존경함은 굳이 그분의 삶을 닮는다든지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계의 큰 나무로서 존경함인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키우시던 두 개의 난(蘭)에서 무소유의 개념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이 때 온 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p25)
그래서 스님은 3년 간 마음의 정성을 다해 가꾸어온 난을 벗에게 주게 됩니다.
"3년 가까이 함께 보낸 ''유정''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 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 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p26)
소유가 자신을 얽어내는 늪이라면 그것 역시 타인에게도 주어서는 안 될 늪지대인 것입니다.
무소유는 어떻게 보면 이기적 발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 영혼의 스승이신 한경직 목사님의 죽음을 세상은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박수를 보내야 했던 가장 핵심적 이유는 무소유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한국의 간디라고 평가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러한 평가는 한경직 목사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일 뿐입니다.
제가 그분을 영적 스승으로 모시는 이유는 무소유 자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이 티코를 타고 다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영적 기상도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스님은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스님은 무소유를 주장해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소유해야 합니다.
소유함으로 오는 자유를 먼저 실천해야 하고 교유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소유함으로 오는 자유...
이는 욕심이 아닙니다.
지식을 소유하고 그 지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음...
재물을 소유하고 그 재물로부터 자유함을 얻음...
명예를 소유하고 그 명예로부터 자유함을 얻음...
건강을 소유하고 그 건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음...
무소유의 없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있음,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청지기로서의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영적 수준은 티코를 타고 다닌다든지,
죽을 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무소유로 말미암는다면 그것은 타락한 종교일 뿐입니다.
하기야 간디를 비롯한 많은 종교의 지도자들은 모든 종교가 하나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 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 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볼 때 털끝만치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길'' 이다 " (p144)
그러나 다릅니다.
삶의 형태는 같지만 그 본질은 기독교와 불교가 다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지만 내 것이 아닌, 나는 다만 청지기로서의 삶...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소유의 개념입니다.
저는 법정 스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무소유개념이라든지 종교의 본질이 같다는 것에 대해선 받아들일 수 없음을 용감히 천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소유를 원하는 것은 대리 만족적 흥분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대리 만족함에 있지 않고 실천함에 있습니다.
스님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무슨 말일까? 마음을 비워 무소유로 만들어 버림일까?
그것은 불가능일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물의 소유 관념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p82)
무소유...
없음과 있음...
있음으로 자유함...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청지기 적인 삶인 것입니다.
없어서 행복함이 아니라 있음으로 행복한 방법을 말하고 실천하는 작은 청지기가 되고 싶습니다.
"내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청지기 일 뿐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무소유 독후감 소개 두번째 글
인터넷 검색 자료 소유의 역사
현대는 소유를 위한 역사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예로부터 인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서,
조금 더 많은 것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하고싶어서
서로간에 다투고, 뺏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만큼 인류를 가장 강하게 유혹하는 욕망은 소유욕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자신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가지기를 원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이렇듯 보통 사람들은 수 억, 수 십억의 재산을 가지고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데 반하여,
법정스님께서는 단지 자그마한 난초 두 분(盆)에도 소유로 인해 나타나는 불안감과 집착을 느끼셨다.
스님께서는 난초를 친구에게 주었을 때야 비로소
소유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듯한 해방감과 홀가분함을 느꼈다고 하셨다.
과연 소유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그 유혹이 너무나도 커서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얻으려 하고,
막상 가지고 나면 그것의 굴레 속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들 자신은 아무리 소유하지 않으려고 해도,
살기 위해서는 소유해야 할 수밖에 없는, 역시나 역설적인 존재이다.
살아오면서 이제껏 '버리는 것만이 얻는 것이다.'
혹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올 때마다
그건 현실과는 큰 괴리감이 느껴지는 말도 안 되는 것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무소유를 읽으면서도 나 역시나 물질만능주의적 사상에 젖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그 무소유의 역리(逆理)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진리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와서는 법정스님의 행동에 공감할 수 있게 됨으로써,
무소유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를 느낄 수 있게되었다.
법정스님께서는 당신과 간디를 자주 비교하신다.
간디는 생전에도 물레와 밥그릇 정도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무소유의 정신을 강조했다.
간디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라고 할 정도로 소유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가 소유를 꺼려한 이유는 소유를 하게되면
생겨나는 소유 관념이 그의 마음을 흐리게 함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했다.
소유와 같은 외부의 환경에 집착하기보다는, 인격을 수양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우리사회에서는 특권계층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
의식(衣食)이 족하고, 아울러 관직까지 높은데 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이들 모두가 남들보다 조금 더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태어나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으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 있다.
소유해봤자 길어야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는 소유이다.
소유함으로써 그 소유물에 집착하여 일생을 소유욕의 노예가 되느니,
무소유 함으로써 서로간에 소유의 분쟁이 없이 화목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여러분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이 현실에 비춰 볼 때 올바른 철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댓글목록

토돌이님의 댓글
토돌이 작성일
뉴스기사 전문 ㅠㅠ
법정 스님은 2월 24일자로 ‘남기는 말’과 ‘상좌들 보아라’ 등 2종류의 유언장을 남겼다.
다음은 17일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가 공증을 거쳐 발표한 유언장 전문.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둬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 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 서울 성북동 323
법정스님 유언 공개 " 책 내지 말아달라!"
정보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7/2010031701309.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01_rel01

족제비님의 댓글
족제비 작성일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정말 바른 철학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속세의 사람에게는 약간 이질적인 이념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전세계가 무소유를 행한다고 합시다. 당연히 세상은 살기 좋아 질것입니다. 하지만 일부가 행하는 무소유는 결국 소유의 압도적인 수세에 밀리기 마련입니다. 무소유에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저 무의 상태에서 가만히 정지해있지요 하지만 소유를 한다면 발전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문명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먼미래에 지구전체를 영토로한 단일 국가가 나온다면 이런 무소유의 뜻을 이념으로 한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식님의 댓글
무식 작성일
사람은 쾌락과 번식을 위해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법규와 도덕도 그것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만든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그런 인간의 욕구를 죄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근본을 무시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족제비님 단일국가가 나온다면 무소유의 뜻을 이념으로 한 나라가 아닐까 싶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생각에는, 문명의 끝이 낳은, 자동화된 세계에서 쾌락만을 추구하고 사는 개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족제비님의 댓글
족제비 작성일사람은 쾌락과 번식을 위해 산다는것은 좀 비약적인 관점인것 같습니다. 쾌락과 번식만을 추구하는것은 자신의 본성만을 추구하는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을 제어할 이성이 있으며 그래서 인간인것입니다. 무소유란 인간의 욕구를 죄라 칭하며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무소유가 옳은것이라 주장할 뿐이지요. 사회의 법규와 도덕들은 특히 도덕의 경우는 쾌락과 번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경우가 조금 이상해 보이는 군요. 대부분은 사회적 법규들은 개인의 과도한 자유를 제한하거나 기본적인 자유권을 인정하고 있는것 뿐이지 인간이 쾌락을 손쉽게 얻게하는 법안은 없는것으로 압니다. 예를 들어 사냥이 취미지만 동물보호법으로 금지되어 있지요. 마지막으로 저와 미래에 대한 의견이 조금 다르신데 저는 문명의 끝을 넘어선 모든것을 넘어선 초국가를 말한것입니다. 아마 영영생겨나지 않을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 문명의 끝이 있다면 그 끝을 넘어선 초국가, 즉 무소유를 이념으로 한 어떤것을 소유하지 않은 그런 나라일것입니다. 인간에게 개성이 없는 세상이랑 있을수 없는 법입니다. 생김새부터 다르며 많은 제약과 제한이 가해져도 튀어오르는 힘은 분명히 있으며 순응한다 하여도 뇌세포하나하나에서 유전자를 지나 태어나면서 겪은 경험같은것을 모두 획일적으로 경험하지 않는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이는군요.

에이고님의 댓글
에이고 작성일
성인이나 위인의 시대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일 뿐입니다. 법정의 무소유사상이 세상에 어필을 하였다면
이 사회가 인간의 소유욕에 의해 붕괴직전의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는 반증입니다
인간에게 무소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 동물, 그리고 생명이기를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생물이고 분자 구성물이고 우주를 이루는 .. 중력처럼 한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우주를 떠도는 수소나 헬륨과 같은 존재가 아닌 이유는 어떤 강한 결집된 에너지체고 그러한 힘의 생물학적
인 형태가 소유욕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 법정이 무소유를 주장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질이 다른 그런 모습의 무소유일 겁니다..... 아마도

족제비님의 댓글
족제비 작성일이해가 잘 되지않네요. 인간이 무소유를 하는것이 왜 인간,동물,생명이길 포기해야하는 것인지요.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아닌 다른 무소유를 말하시는것 같은데.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욕심과 욕망 아집입니다. 예를들어 책에 보면 나오듯 난초같이 가꾸어줘야하는 식물을 기를경우 너무 가꾸려고 욕심을 부리며 소유를 하려는 경우.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난초만 바라 보아야하니 그게 괴로움이고 갈등의 원인이라는 거지요.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우리가 생각하는 무소유는 님이 생각하는 무소유와 길이 다른 그런 무소유 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