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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물 특출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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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이야기]
대학의 첫날, 모든 신입생들처럼 나도 기거할 방을 찾고 있었다.
정면의 캠퍼스가 보이는 앞쪽의 방을 발견했으나 이미 다른 학생이 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복도에서 나처럼 낙심에찬 학생을 만났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서로 쳐다봤다. 막 돌아서려는데 여자 관리인이 말했다.
"여기 좀 봐요. 이 건물의 뒤쪽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요. 방도 좋고 두 사람이 기거할 정도로 크니 한 번 보세요."
목적이 같을 때는 낯선 사람들도 쉽게 친구가 된다. 우리는 다시 서로 쳐다봤다.
마치 상대방의 성격을 탐색하려는 듯 좀 더 차분히 서로 관찰했다. 그리고는 함께 방으로 갔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물었다.
"네가 좋다면 있어 보지" 나의 새 친구는 내 물음에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또는 신의 뜻에 의해, 나는 조선에서 온 셔우드 홀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곧 그가 이상적인 동료이며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흥미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임을 알았다.
함께 지낸 숱한 날 밤마다 홀은 침대에 걸터앉아 놀랍고도 신기한 경험담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열심히 경청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는 머리를 짧게 깎았으므로 머리에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흉터는 내가 죽을 뻔했다는 표적이야. 어머니가 안식년 휴가 중일 때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고 있었지. 갑자기 그날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인 걸 알고 선장은 축하를 해야 한다고 결정했었어. 마침 근처에 지나가는 배가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축포를 쏘기로 했지. 안전하게 뒤로 물러서야 했는데도 어떻게 쏘는지 보려는 호기심에서 앞으로 다가섰거든. 대포는 불을 댕기자 큰 소리를 내며 수천 개의 조각으로 터졌단 말이야. 그 중의 파편 하나가 윙하고 날면서 내 머리를 스쳤어. 내 곁에 있던 중국인은 그 조각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 나도 처음에는 죽아ㅓㅆ는 줄 알았는데 머리에서 피가 나면서 아픔을 느꼈지. 그래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아픔의 가치' 에 대하여 감사했던 기회이기도 했어. 그때 내 머리가 조금만 뒤로 움직였다면 아마도 지금 여기서 너와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나는 홀의 머리를 향해 축하를 했다. 홀의 뛰어남은 학교생활 중에 곧 드러났다. 그는 교회, 선교단체, 친지들의 모임에 나가서 조선에 관한 역사, 부모의 사업, 조선과 다른 곳에서 얻은 경험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 했다.
---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중에서 ---
1893년 조선에서 태어난 미국 소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
그의 부모는 의료선교사로서 대한제국 말엽 평양에 처음으로 병원을 개업하였고, 청-일 전쟁 후 전염병이 번져 철수를 권고했으나, 의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계속 일하다가 아버지 닥터 월리엄 제임즈 홀은 결국 그 병에 결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한 후 다시 조선에 돌아와서 평생을 바쳐 봉사하였고, 말과 행동, 사고방식이 한국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운 사람.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 사람. 일본의 온갖 방해를 받고 범죄자로 누명을 씌워 추방당해서 인도로 갔는데 그곳에서 한국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100년 전 우리 사회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감사한 우리나라.
숨은 봉사자와 그들의 헌신이 있었음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학의 첫날, 모든 신입생들처럼 나도 기거할 방을 찾고 있었다.
정면의 캠퍼스가 보이는 앞쪽의 방을 발견했으나 이미 다른 학생이 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복도에서 나처럼 낙심에찬 학생을 만났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서로 쳐다봤다. 막 돌아서려는데 여자 관리인이 말했다.
"여기 좀 봐요. 이 건물의 뒤쪽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요. 방도 좋고 두 사람이 기거할 정도로 크니 한 번 보세요."
목적이 같을 때는 낯선 사람들도 쉽게 친구가 된다. 우리는 다시 서로 쳐다봤다.
마치 상대방의 성격을 탐색하려는 듯 좀 더 차분히 서로 관찰했다. 그리고는 함께 방으로 갔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물었다.
"네가 좋다면 있어 보지" 나의 새 친구는 내 물음에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또는 신의 뜻에 의해, 나는 조선에서 온 셔우드 홀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곧 그가 이상적인 동료이며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흥미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임을 알았다.
함께 지낸 숱한 날 밤마다 홀은 침대에 걸터앉아 놀랍고도 신기한 경험담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열심히 경청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는 머리를 짧게 깎았으므로 머리에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흉터는 내가 죽을 뻔했다는 표적이야. 어머니가 안식년 휴가 중일 때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고 있었지. 갑자기 그날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인 걸 알고 선장은 축하를 해야 한다고 결정했었어. 마침 근처에 지나가는 배가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축포를 쏘기로 했지. 안전하게 뒤로 물러서야 했는데도 어떻게 쏘는지 보려는 호기심에서 앞으로 다가섰거든. 대포는 불을 댕기자 큰 소리를 내며 수천 개의 조각으로 터졌단 말이야. 그 중의 파편 하나가 윙하고 날면서 내 머리를 스쳤어. 내 곁에 있던 중국인은 그 조각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 나도 처음에는 죽아ㅓㅆ는 줄 알았는데 머리에서 피가 나면서 아픔을 느꼈지. 그래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아픔의 가치' 에 대하여 감사했던 기회이기도 했어. 그때 내 머리가 조금만 뒤로 움직였다면 아마도 지금 여기서 너와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
나는 홀의 머리를 향해 축하를 했다. 홀의 뛰어남은 학교생활 중에 곧 드러났다. 그는 교회, 선교단체, 친지들의 모임에 나가서 조선에 관한 역사, 부모의 사업, 조선과 다른 곳에서 얻은 경험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 했다.
--- 닥터 홀의 '조선 회상' 중에서 ---
1893년 조선에서 태어난 미국 소년의 삶에 관한 이야기.
그의 부모는 의료선교사로서 대한제국 말엽 평양에 처음으로 병원을 개업하였고, 청-일 전쟁 후 전염병이 번져 철수를 권고했으나, 의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계속 일하다가 아버지 닥터 월리엄 제임즈 홀은 결국 그 병에 결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한 후 다시 조선에 돌아와서 평생을 바쳐 봉사하였고, 말과 행동, 사고방식이 한국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운 사람.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 사람. 일본의 온갖 방해를 받고 범죄자로 누명을 씌워 추방당해서 인도로 갔는데 그곳에서 한국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100년 전 우리 사회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감사한 우리나라.
숨은 봉사자와 그들의 헌신이 있었음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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