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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토론실
댓글 0건 조회 2,564회 작성일 05-04-13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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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등, 산문집으로 『연어』, 『관계』등 다수 간행. 제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제13회 소월시문학상, 제1회 노작문학상 등 수상.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 제목: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국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녁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득 한 장의 엽서가 날아옵니다. 낯선 소인이 찍힌 그림엽서 한 장! 그제서야 나는 나를 포위하고 있는 일상 저 너머 이미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버린 풍경 하나를 떠올립니다. 그건 엽서란 걸 써 봐야 빼빼마른 나귀 우체부가 어떻게 저 까마득한 문명세계로 날라다 줄지 기가 차기만 했던 히말라야 산중턱일 수도 있고, 하루에도 예닐곱 번 날씨가 바뀌는, 눈이 오다가 비가 오고, 무지개가 뜨다가 우박이 퍼붓던 티벳 고원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거기 있어서, 오직 어떤 꿈만으로 엽서를 썼겠지요. 그리고 코 한번 풀 듯 너무나 쉽게 일상으로 돌아온 뒤, 마치 어디다 흘렸나 싶었는데 세탁을 끝낸 바지에서 찾아낸 지폐처럼 뒤늦게 그 엽서를 받아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절대였습니다. 완벽이었습니다. 유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나는 다시 무엇인지요! 말 같잖은 꿈에서 깨어 현실의 생에 잘 복귀했노라 오히려 격려를 해주시렵니까? 고맙지만 아직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도 아마 그런 곳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우체국 하나 없다면 우리 생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우체국!―그런 우체국에 가면 아마 옛 애인처럼 잘 늙어가는 여인이 쓸데없이 많은 엽서를 사가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라서 그걸 감히 쓸데없노라 말하겠는지요.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이라고 해서, 사랑마저 끝났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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