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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심리 모든 문제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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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할머니가 오두막집 앞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그 할머니를 도와 바늘을 찾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자 한 사람이 물었다.
"이렇게 넓은 데서 조그마한 바늘 하나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요. 그걸 어디다 떨어뜨리셨는지 혹 모르세요?"
그 할머니가 말하기를, "응, 집안에서 떨어뜨렸어." 사람들이 어이없는 듯 외쳤다.
"이런,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예요? 집안에다 떨어뜨린 걸 왜 여기서 찾는단 말예요?"
할머니가 말하기를,
"여기가 밝기 때문이지, 집안은 어두워."
한 사람이 물었다.
"이런, 아무리 밝아도 그렇지, 여기서 잃은 적도 없는 바늘을 어떻게 찾는단 말예요? 집안에다 불을 밝히고 찾으면 되잖아요."
할머니가 웃으며 말하기를,
"아주 똑똑한 양반들이구먼. 작은 일에는 말이지. 근데 그대들 내적 삶에서는 어떻던가? 죄다 바깥에서만 찾지 않던가? 그대들이 찾는 그것들이란 안에서 잃어버린게 아니던가? 머리를 바로 쓰게들.! 왜 바깥에서 찾는가? 거기서들 잃어버렸는가?"
보라! 어리석은 인간은 어디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있으며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모두들 '나'를 떠난 바깥에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모든 문제는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며, 그 해답도 인간 내면에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의 해답을 밖에서 찾아 왔다.
외면적 대상으로 향하고 있는 이성의 눈은 항상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사실은 이것이다. 독단적 이성의 눈은 자기가 본 나무만을 전체인 듯 맹신한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이 말이다.
우리의 눈은 항상 죽어 고정된 외면이 아니라 살아 생동하는 내면을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더구나 죽은 파편이 아니라 산 전체를 통째로 관조하기 위하여 눈은 크게 뜨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행복이라는 것을 기성복과 같이 외부에서 만들어져 입혀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것은 집안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집 바깥에서 찾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어리석고 환각에 취한 작태이다. 바깥에서 주어지는 행복은 충동적이고 환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의 문제는 내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바깥의 대상을 끌어 들여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마치 혹을 떼려고 하다가 혹 하나를 더 붙이는 꼴이 되고 만다. 바깥의 대상물들은 이내 절대화되고 부패화되어 인간을 더욱 썩은 욕망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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