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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는 무엇인가? 조선시대 선비에게는 예란 서구적인 태도와 예절의 차원을 넘어서는 궁극적 관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다. 이는 조선후기를 지배한 최대의 정치적 사안이 ‘예송논쟁(禮訟論爭)’ 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예(禮)라고 하는 인문적 문제를 가지고 여야 간에 치열하게 대립하였다는 데에서 조선사회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예를 자각할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나오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직언 할 수 있는 강직함이 나온다.
온양온천에서 승용차로 15분 정도 들어가면 삼산양수(三山兩水)의 양명한 터에 자리잡은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다. 외암리 중심에는 예안 이씨였던 이 간(李 柬: 1677~1727)의 고택이 건재하다. 이 간은 조선후기 예송논쟁의 주역이던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학맥을 계승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가운데 한 명으로 유명하다. 그런 만큼 이 집안에는 조선시대의 주요 흐름이던 노론의 예학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종손인 이득선(李得善, 62세)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득선 씨는 1970년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비집안의 상례(喪禮)에 따라 3년 시묘를 교과서대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 당시 31세던 그는 한양대학교 토목과 조교였다. 그러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내려와 3년 시묘라는 고행에 들어갔다. 관, 혼, 상, 제의 사례(四禮) 가운데 가장 고난도의 의례가 상례다. 3년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발은 짚신을 신고, 머리에는 굴건을 쓴다. 옷은 제복 생활을 해야 한다. 허리에 메는 허리띠는 왕골, 볏짚, 마 껍질을 꼬아서 만들었는데 무게가 무려 5근(3kg)이나 된다. 이득선 씨는 이러한 중장비를 갖추고 매일 새벽에 아버지 묘소로 출근하여 해떨어질 무렵에 퇴근하는 생활을 3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하였다. 집에서 묘소까지는 3km. 산길로 걸어서 50분이 걸렸다. 그래서 묘소 옆에 원두막을 지어놓고 하루종일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겨울에 눈이 묘소에 쌓이면 아무리 춥더라도 묘소를 손으로만 치웠다. 손이 시리다고 빗자루를 사용하는 것은 망자에 대한 불경이었으므로 사용할 수 없었다. 3년 시묘는 1972년 겨울에 끝났다. 조선시대 사람도 아니고, 70년대 대학 조교를 하던 현대인이 3년 시묘라는 중세의 고행을 한 결정적인 이유는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또 아버지가 하고 할아버지도 한 상례를 내 대에 와서 그만둘 수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명문가 후손이 자각하는 집안의 전통을 현재의 실용주의의 관점으로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종손인 이득선 씨는 그 사명감으로 중세적인 3년 시묘를 20세기에도 실천할 희귀한 인물이다. 그 소문을 듣고 가끔씩 주한 외국 대사들도 이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3년 시묘라는 상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성찰로 해석할 수 있다. 무덤 옆에서 3년 동안 죽음을 철저하게 사색하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변한다.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삶이 지닌 무거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3년 시묘라는 외형적 형식보다는, 그 형식을 통해서 지향하려고 했던 내면의 정신이다. 조선의 예학은 상례라고 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나라가 지금 그믐 밤중처럼 깜깜한 상황이라서 등불을 들었다” 예학 정신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도 나타난다. 이 집에는 다른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그만 마루가 하나 더 있다. 가로 90cm, 세로 70cm 크기의 아주 작은 이 마루는 사랑채 부엌 옆에 있다.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외암리에 참판댁으로 불린 이 집에는 인근 거지들이 유독 많이 찾아왔다. 해방 전에는 하루에 열 서너 명, 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평균 서너 명씩의 거지들이 아침밥 먹을 무렵 구걸을 왔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거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치 한 그릇을 놋그릇에 각각 담고, 이 그릇들을 다시 소반에다 차려서 사랑채 부엌 옆의 마루에다 놓았다. 사랑채 부엌 아궁이는 손님방에 불을 때고 여물을 끓이기 때문에 항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마루에 앉아서 거지들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이 집의 전통이었다. 최하층인 거지를 대하는 데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예학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배려를 감지한 거지들도 고마움의 표시로 식사를 마치면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서 부엌에다 내려놓고 갔다. 다른 집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던 거지들도 이 집에 와서는 점잖게 행동했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예학의 정신은 강직한 처신으로도 이어졌다. 이득선 씨의 조부인 이정열(李貞烈)씨는 고종 때 이조참판을 지냈다.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 이조참판을 지냈던 이정렬은 을사보호조약 후 경부선, 경의선과 같은 철도사업을 비롯하여 금광채광굴과 같은 각종 국가기간산업이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하자 그는 이를 저지해야 한다고 스무 번이 넘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을 올려 보아야 아무 효과가 없자 마침내 최후의 방식을 택하였다. 이정렬은 임금이 참석하는 아침 조회시간에 등불을 들고 말을 거꾸로 탄 채 출근했다. 임금이 참석하는 조회시간에 말을 탄 채로 들어가는 행위는 엄청난 불경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정렬은 ‘나라가 그믐 밤중처럼 깜깜한 상황이라서 등불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주변의 호위병들이 칼로 내리칠 때 정면으로 보고 들어가면 무의식적으로 칼을 피하려고 하지만, 뒤로 들어가면 볼 수 없으므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말을 거꾸로 탔다. 「황성신문」에서는 3일 동안 이정렬의 강직함을 ‘조선에도 봉황이 울었으니 아침 햇볕이 내리 쬘 것(鳳鳴朝陽)’이라고 찬탄하였다.
온양온천에서 승용차로 15분 정도 들어가면 삼산양수(三山兩水)의 양명한 터에 자리잡은 외암리 민속마을이 있다. 외암리 중심에는 예안 이씨였던 이 간(李 柬: 1677~1727)의 고택이 건재하다. 이 간은 조선후기 예송논쟁의 주역이던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학맥을 계승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가운데 한 명으로 유명하다. 그런 만큼 이 집안에는 조선시대의 주요 흐름이던 노론의 예학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종손인 이득선(李得善, 62세)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득선 씨는 1970년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비집안의 상례(喪禮)에 따라 3년 시묘를 교과서대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 당시 31세던 그는 한양대학교 토목과 조교였다. 그러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내려와 3년 시묘라는 고행에 들어갔다. 관, 혼, 상, 제의 사례(四禮) 가운데 가장 고난도의 의례가 상례다. 3년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발은 짚신을 신고, 머리에는 굴건을 쓴다. 옷은 제복 생활을 해야 한다. 허리에 메는 허리띠는 왕골, 볏짚, 마 껍질을 꼬아서 만들었는데 무게가 무려 5근(3kg)이나 된다. 이득선 씨는 이러한 중장비를 갖추고 매일 새벽에 아버지 묘소로 출근하여 해떨어질 무렵에 퇴근하는 생활을 3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하였다. 집에서 묘소까지는 3km. 산길로 걸어서 50분이 걸렸다. 그래서 묘소 옆에 원두막을 지어놓고 하루종일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겨울에 눈이 묘소에 쌓이면 아무리 춥더라도 묘소를 손으로만 치웠다. 손이 시리다고 빗자루를 사용하는 것은 망자에 대한 불경이었으므로 사용할 수 없었다. 3년 시묘는 1972년 겨울에 끝났다. 조선시대 사람도 아니고, 70년대 대학 조교를 하던 현대인이 3년 시묘라는 중세의 고행을 한 결정적인 이유는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또 아버지가 하고 할아버지도 한 상례를 내 대에 와서 그만둘 수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명문가 후손이 자각하는 집안의 전통을 현재의 실용주의의 관점으로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종손인 이득선 씨는 그 사명감으로 중세적인 3년 시묘를 20세기에도 실천할 희귀한 인물이다. 그 소문을 듣고 가끔씩 주한 외국 대사들도 이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3년 시묘라는 상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성찰로 해석할 수 있다. 무덤 옆에서 3년 동안 죽음을 철저하게 사색하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변한다.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삶이 지닌 무거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3년 시묘라는 외형적 형식보다는, 그 형식을 통해서 지향하려고 했던 내면의 정신이다. 조선의 예학은 상례라고 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나라가 지금 그믐 밤중처럼 깜깜한 상황이라서 등불을 들었다” 예학 정신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도 나타난다. 이 집에는 다른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그만 마루가 하나 더 있다. 가로 90cm, 세로 70cm 크기의 아주 작은 이 마루는 사랑채 부엌 옆에 있다.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외암리에 참판댁으로 불린 이 집에는 인근 거지들이 유독 많이 찾아왔다. 해방 전에는 하루에 열 서너 명, 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평균 서너 명씩의 거지들이 아침밥 먹을 무렵 구걸을 왔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거지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치 한 그릇을 놋그릇에 각각 담고, 이 그릇들을 다시 소반에다 차려서 사랑채 부엌 옆의 마루에다 놓았다. 사랑채 부엌 아궁이는 손님방에 불을 때고 여물을 끓이기 때문에 항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마루에 앉아서 거지들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이 집의 전통이었다. 최하층인 거지를 대하는 데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예학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배려를 감지한 거지들도 고마움의 표시로 식사를 마치면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서 부엌에다 내려놓고 갔다. 다른 집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던 거지들도 이 집에 와서는 점잖게 행동했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예학의 정신은 강직한 처신으로도 이어졌다. 이득선 씨의 조부인 이정열(李貞烈)씨는 고종 때 이조참판을 지냈다.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 이조참판을 지냈던 이정렬은 을사보호조약 후 경부선, 경의선과 같은 철도사업을 비롯하여 금광채광굴과 같은 각종 국가기간산업이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하자 그는 이를 저지해야 한다고 스무 번이 넘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을 올려 보아야 아무 효과가 없자 마침내 최후의 방식을 택하였다. 이정렬은 임금이 참석하는 아침 조회시간에 등불을 들고 말을 거꾸로 탄 채 출근했다. 임금이 참석하는 조회시간에 말을 탄 채로 들어가는 행위는 엄청난 불경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정렬은 ‘나라가 그믐 밤중처럼 깜깜한 상황이라서 등불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주변의 호위병들이 칼로 내리칠 때 정면으로 보고 들어가면 무의식적으로 칼을 피하려고 하지만, 뒤로 들어가면 볼 수 없으므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말을 거꾸로 탔다. 「황성신문」에서는 3일 동안 이정렬의 강직함을 ‘조선에도 봉황이 울었으니 아침 햇볕이 내리 쬘 것(鳳鳴朝陽)’이라고 찬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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