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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명언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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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 ▲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입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람이 죄가 더럽다는 것은 다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의(義)도 더럽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의(義)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와 마찬가지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선, 인간이 행하는 의로운 행동도 하나님 보실 때는 옷은 옷인데 더러운 옷입니다. 그 더러운 옷으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사람 속에는 타락된 마음, 양심의 부끄러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면 죄에 대한 양심의 부끄러움과 가책감이 없어질 줄 알지만, 그것은 더러운 사람이 더러운 걸레 조각을 걸치고 자기 수치를 가려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쓸 데 없는 짓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입사귀 같으므로.”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고 난 후,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하고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 아담, 하와 두 사람 밖에 없었지만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만든 옷은 동물들에게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부끄러워서도 또 추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수치를 가려보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창세기 3:8-10).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벗었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낮에 선악과를 따 먹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낮 햇볕에 금방 잎이 마른데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앉았다 일어섰다 몇번 하니까 나뭇잎 옷이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녁 때 하나님이 부르실 때쯤 해서는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었을 것입니다. 입기는 입었지만 실은 벗은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열심은 마치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 수치를 가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화과가 옷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윤리 도덕과 종교생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의로운 행동들이 자기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덮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선행과 열심으로도 우리의 죄악을 가릴 수 없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지옥까지 몰아갑니다. 이 운명을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입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람이 죄가 더럽다는 것은 다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의(義)도 더럽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의(義)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와 마찬가지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선, 인간이 행하는 의로운 행동도 하나님 보실 때는 옷은 옷인데 더러운 옷입니다. 그 더러운 옷으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사람 속에는 타락된 마음, 양심의 부끄러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면 죄에 대한 양심의 부끄러움과 가책감이 없어질 줄 알지만, 그것은 더러운 사람이 더러운 걸레 조각을 걸치고 자기 수치를 가려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쓸 데 없는 짓입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입사귀 같으므로.”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고 난 후,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하고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 아담, 하와 두 사람 밖에 없었지만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만든 옷은 동물들에게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부끄러워서도 또 추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수치를 가려보려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창세기 3:8-10).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벗었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낮에 선악과를 따 먹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낮 햇볕에 금방 잎이 마른데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앉았다 일어섰다 몇번 하니까 나뭇잎 옷이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녁 때 하나님이 부르실 때쯤 해서는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었을 것입니다. 입기는 입었지만 실은 벗은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과 열심은 마치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자기 수치를 가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화과가 옷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이 행하는 윤리 도덕과 종교생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의로운 행동들이 자기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덮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선행과 열심으로도 우리의 죄악을 가릴 수 없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지옥까지 몰아갑니다. 이 운명을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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