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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토론실
댓글 0건 조회 5,893회 작성일 02-09-30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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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역사목록입니다. [바로가기]
1. 고대 서양 문명으로부터 출발
2. 로마의 토론 :토론의 기능 변화
3. 중세 시대의 토론
4. 영 미 토론과 민주주의의 발달
5, 중국과 일본의 토론의 역사
6. 한국 토론의 역사
7. 맺는말 

1. 고대 서양 문명으로부터 출발

토론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의 정치적 민회와 법정 토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론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것은 자의적이고 허무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마 문 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전통을 바탕으로 인류 문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현대 문명의 굳건한 발판을 제공하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은 토론을 학문의 한 분야로 인식하여 제반 사회 쟁점의 해결 도 구와 수단으로 이용하여 왔다.
토론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의 확산과 발달에 기여한 바가크다. 그리스 문명은 도시 국가로 발달 하였으며 그 중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정체로 채택하여 운영하던 국가였다. 민주주의를 정치 체제로 택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법적 주요 사안에 대하여 토론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였다. 중요한 정치적 사안은 직접 민주주의 형태인 민회에서 토론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하였다. 민회의 주요 사안들은 국방, 외교, 납세, 재정 정책 등에 관한 것이었으며 소송은 법정에서 원고측과 피고측의 변론을 통해 배심원들이 결정하였다.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가지는 동시에 제기된 소송의 배심원으로 선택되면 판결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아테네 시민이면(노예와 여자는 제외됨) 누구나 정치 민회에서 자기의 주장과 견해를 발표할 기회를 가졌으며, 대개의 경우 한 번 개최되면 일 주일 이상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자기의 주장과 정책에 대한 견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는데 그런 자기 주장을 펼치는 공간이 바로
아고라(Agora)였다. 법정 토론은 소송의 규모와 심각성에 따라 달랐다.
살인죄 등과 같은 중 죄인 경우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라는 대법정이 열렸으며 한 번 열릴 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배심원이 선정되었다. 법정 기소와 변호는 스피치와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법정에는 물시계를 설치하여 5,000드라코마(화폐 단위)가 넘는 사건인 경우 기소는 10콘기우스(물의 양)가 허용되었고 변론에는 3콘기우스가 허용되었으며, 5,000드라코마 이하는 7과 3콘기우스이고, 1,000드라코마 이하는 5와 2콘기우스로 시간을 할당했다.
현대 토론 에서 사용되는 시간 제한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간에 자기의 의사를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는 능력은 재산을 보호하고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방어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배심원은 아테네 시민들 중 무작위로 선정하였는데 선정된 사람은 아테네 시민으로서 재판 과정에 참석해야 할 의무와 판결의 의무를 가졌다. 정치적 토론(deliberative)이 미래의 선택을 결정하는 반면 법정 토론 (forensics)은 과거의 행위에 대한 사실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회적 토론(epideictic)은 현재 공동체가 가져야 할 가치관의 옳고 나쁨을 따졌다. 미래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측은 자기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 과거에 일어난 사례들과 비유하는 방법을 많이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 다리우스왕의 침공에 대해 전쟁으로 그리스를 방어하느냐, 아니면 패배할 가능성이 많으니 협상을 통해 물질적 피해를 최소화하느냐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면 과거의 사례, 혹은 이웃 국가 들의 유추적 사례를 그 논거로 많이 제시하였다. 반면 법정에서는 범죄 행위의 사실 유무, 행위의 정도로 판결하였으므로 삼단 논법이나 생략 삼단 논법에 의거한 논거가 많이 제시되었다. 정치 사회 법정 토론의 주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책(policy) 가치 (value) 사실(faft)로 구분하였으며 각 주제에 따라 토론의 기법적 특성을 연구하였다.
정치 사회 토론은 정책과 가치에 대한 주제이며 법정 토론은 사실 유무에 대한 토론인 것이다. 정책, 가치, 사실에 대한 구분은 이후 영 미 학생 토론 대회의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현대 아카데미식 토론은 정책과 가치에 대한 주제가 많은 반면 법대 학생들은 사실 유무를 따지는 모의 법정 토론을 많이 열고 있으며 주제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채택한다. 그러나 주어진 토론에서 때론 정책적 주제도 가치와 연결하거나, 혹은 가치가 쟁점인 것으로 변질시키거나 가치적 주제를 정책적인 것으로 변질하는 것마저도 토론의 중요한 기법으로 인식하였다. 아테네에서는 토론과 토론 평가 능력을 민주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본적 소양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로 토론을 가르치는 학원이 성행하였으며 이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각자의 소피스트들에 따라 지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에서부터 현실적인 정치적 주제와 법정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성행하였다. 플라톤(Plato)이 운영한 학교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수학한 아카데미(Academy)였으며, 이소크라테스(Isocrates)가 운영한 학교는 리시움(Iyceum)이었다. 이와 같이 각각의 학원 명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s) 중 한 사람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토론학의 시조라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그 만물은 그런 것과 그렇지 않는것으로 이루어졌다. '라는 명제를 던졌는데, 수천 년 간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 명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앞 문장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만 인용하여 프로타고라스의 명제를 철학의 중요한 방법인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두번째 명제인 '그 만물은 그런 것과 그렇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명제라고 볼 수 있다.
이 명제는 변증법의 기초가 되어 2200년 후 헤겔에 의해 인류 역사의 변천을 변증법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를 유물론적(물질과 상품의 교환) 변증법으로 설명하여 20세기에는 전세계가 마르크스의 시각에 의해 '그런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유추인 공산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로 양분되었고 21세기에도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이 명제는 변증법적 관점과 함께 모든 주장과 사상은 반대되는 주장과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며 찬성(正)과 반대(反)의 인식 과정이나 토론을 통해 진리를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즉, 인간의 앎이란 인간 내면 속에서 내재적으로 찬성(正)과 반대(反)의 이성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며, 이런 개인적 앎은 공공 장소에서 다른 앎을 가진 다른 이와의 토론을 통해 진정한 앎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프로타고라스를 토론학의 시조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이는 토론이 인류 사회에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동시에 토론을 통해 진리를 규명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토론학의 철학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개인 학원을 은영하여 제자들에게 강의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토론의 방법을 가르치며 오전엔 긍정측의 입장에서 토론하게 하고 오후엔 반대측 입장에서 토론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프로타고라스와 달리 소크라테스(Socrates)와 플라톤(Plato)은 윤리와 참 진리에 의거한 주장만이 진정한 토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 영혼을 썩게 한다'는 죄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까지 참 진리만이 진정한 진리라는 교훈을 가르쳤다. 이소크라테스(Isorrates)는 토론의 교육적 관점을 강조하였으며 리시아스(Lysias)나 앤티폰(Antiphon)은 수수료를 받고 법정 토론의 원고를 대필해 주기도 하였다.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삼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학문과 소피스트들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현대 서구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레토릭(Rhetoric)에서 정치 사회 법정 토론의 기법과 전략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현대 토론학에서도 그의 개념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2. 로마의 토론 :토론의 기능 변화

그리스 토론 문화는 로마 문명으로 계승되지만 B.C. 1세기경 첫 황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등극하면서 공화정은 막을 내리고 전제정이 시작되었고 토론은 선택된 엘리트들의 소유물로 변질된다. 당시 전제정에 반대한 로마의 정치인이자 수사학자였던 키케로(Cicero)는 "나와 함께 공화정은 끝났다(With me dies, Republic)"라는 유언을 남기고 살해되었다. 전제정이 시작되기 전 공화정 시절엔 로마의 의회(Senate: 현 영어 '상원 의원'의 기원)에서 정책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법정 토론은 그리스와 달리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이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갖춘 판사가 판결하였으며 원고인과 피고인은 직접 기소와 변호에서 변호인이나 검사를 통한 대리인이 토론을 담당하게 되었다. 로마 초기에는 정치적 견해와 공공 토론을 하는 행위와 공간을 포럼(Forum)으로 불렀으며 포럼에는 연단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 연단을 로스트럼(Rostrum)이라 하였다.  

3. 중세 시대의 토론

이후 중세 암흑기에 토론은 정치적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었으며, 토론의 주제 중에서 특히 진실을 규명하는 토론은 사라지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만 발달하게 되었다.
12세기에 들어와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면서 볼로(Bologna)와 파리 등 유럽 각지에 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토론이 학문의 발달에 끼치는 영향과 기능에 대한 연구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학문이 명제와 가설에 대 한 긍정과 부정의 주장을 분석, 비판하지 않고 발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관해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토론은 인문학도뿐만 아니라 자연과학도에게도 필수 교양 과목이 되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는 1년 동안 토론 과목 수강이 필수였다. 13세기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1학년생은 1년 동안 명제나 주제에 대한 찬반 토론을 학습하면 'General Sophister' 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2학년에서는 심화 과정을 수강하였다. 이후 토론학은 4학년 졸업생의 구두 시험으로 발전되어 졸업의 중요한 마지막 관문으로 정착되었다.  

4. 영 미 토론과 민주주의의 발달

1) 영국의 토론

1265년 영국의 하원(House of Commons)이 설립되었으며 하원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의회 토론이었다.
그러나 영국 하원은 때론 영국 왕들에 의해 전쟁, 혹은 재정 확충을 위한 종속적 기구로 전락하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근대 민주 사회의 태동과 함께 토론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일어난다.
근대 영국 의회 토론에 기초를 닦은 이는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영국 의회의 민주적 정치 기능을 강조하였으며 의회 토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영국 의회 토 론은 18세기 들어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크게 발달한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토론 클럽이 생기면서 당시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중산층 출신의 회원들이 많이 가입하여 정치 사회적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후 영국은 의회 정치를 통해 토론이 발달하게 되며 토론의 기술과 능력은 영국 의원의 기본 소양이 된다. 영국 의회 토론은 형식적인 면에서 전통과 규율을 인정하면서도 내용적인 면에선 독립성과 자율성을 중시한다.
영국 의회의 토론은 근대 토론의 규범이 되었으며 현재의 아카데미식 토론 방식의 하나인 의회 토론 방식(parliamentary debate format)의 원류가 되었다. 19세 중엽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토론의 정치 교육적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토론의 활성화를 권장했다. 대학간 아카데미식 토론을 개최한 곳도 영국의 기록이 가장 오래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14세기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학생들 간에 처음으로 대학간 토론 대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이 후 근대에 들어와 영국에서 교육의 한 방편으로 토론이 발달하면서 민주 시민 양성에 큰 몫을 하게 된다.  

2) 미국의 토론

미국의 토론 문화는 타운 흘 미팅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타운 홀 미팅이란 시민이면 누구든 참가하여 자기 의사를 표명하며 투표로 결정하는 회의 방식이다. 이 토론 방식은 공동체의 자유 토론 방식이다. 이것은 영 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공동체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했던 미국식 공개 토론 방식으로 현재는 토론의 한 형식을 일컫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미국은 지금도 각 공동체마다 다양한 사안에 대해 수많은 타운 흘 미팅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1997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시에서 사슴 사냥권 허용 여부를 가리기 위해 타운 흘 미팅 형식의 토론이 이루어졌다 찬성측은 사슴의 수가 너무 많아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반대측은 사슴의 수가 정확히 측정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로선 결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6개월 간에 걸친 토론을 통해 사안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진 후 찬반 투표로 의사를 결정하였다. 이렇듯 미국의 토론 문화는 뿌리가 깊다. 미국은 역사상 다양한 형태의 토론이 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현재의 아카데미식 토론도 미국에서 발달하였다. 아래에서는 미국의 토론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대통령 선거 토론을 중심으로 정치 토론의 발달을 살펴본 후 아카데미식 토론의 역사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1) 토론의 정치적 기능

미국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민주제를 채택하면서 토론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다양한 선거를 민주적으로 치르는 과정에서 정치 토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858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1860년 미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일리노이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당시 주지사였던 스테픈 더글러스(Stephen Douglas)와 벌인 토론을 계기로 미국은 현대 선거 토론의 방식을 마련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토론은 미국 민주 정치 사상 중요한 사건이었다. 도전자 링컨의 선거 토론 제의를 받아들여 두 후보는 총 7회에 걸친 토론을 벌였다. 당시 노예 제도에 대한 찬반 토론이 주 쟁점이었으며 두 후보의 격렬한 토론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권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정견을 직접 비교, 대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토론은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대여서 사회자가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 서로 직접 질문과 대답을 하였다. 한 후보자가 입론에서 1시간 연설을 한 후 상대 후보가 그에 대한 반박과 질의를 1시간 30분 동안 하고, 그리고 처음 후보가 다시 30분 연설을 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링컨은 일리노이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이 토론회를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높였고 이어 2년 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이후 찬반 토론 형태를 링컨 -더글러스 토론 형식(Lincoln-Douglas debate format)이라 일컬었으며 오늘날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 아카데미식 토론 대회에서는 일 대 일 찬반 토론 형식을 링컨 -더글러스 방식이라 부른다.
1700년대 들어와 예비 선거에서 각 당 후보자들간의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20년대 라디오의 발달과 1940∼1750년대 텔레비전의 대중화에 따라 대통령 후보의 선거 토론이 전국적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
대통령 후보자간 텔레비전 선거 토론은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이 효시로서,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다. 이후 대선 토론은 미국 대통령 선거의 중요한 정치 과정과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이란 측면에서 후보자와 유권자를 직접 연결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은 짧은 시간에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너무 많은 사안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토론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진정한 토론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토론 방법을 실험하고 있는 실정이다. 패널리스트들을 구성하여 질문하는 형태로 토론을 진행해 본 결과 후보자들이 상대 후보의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패널리스트들의 질문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다.
1996년 대선 토론부터는 패널리스트들을 없애고 사회자 한 사람이 질문을 하는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사회자는 될 수 있는 한 중재자의 역할과 토론 진행자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하였다. 또한 토론의 주최자도 1960년엔 주요 텔레비전 방송사였으나 1976년에서 1984년 사이에는 여성 유권자 연맹 주최로 열렸으며 1988년 이후 지금까지는 대통령 선거 토론 위원회를 만들어 이 단체가 주최하고 있다.
그러나 대선 토론에서의 몇몇 문제점은 여전히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첫째, 대선 토론이 너무 축약된 형태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둘째, 후보 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애매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부동층(浮動層)'의 표를 흡수하거나 이탈표를 방지하는 데 급급하다는 점이다.
셋째, 토론을 통해 후보자의 자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00년 대선 토론에서는 다양한 방식을 선보였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이었던 민주당 후보 앨 고어(Al Gore) 와 텍사스 주지사였던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George W Bush) 사이에 세 차례의 토론이 열렸다. 3차례에 걸친 토론에서 1차는 두 후보자와 사회자가 120도 각도를 향하게 배치하여 토론자가 연설대에 서서 답하는 형식을 취했고, 2차는 120도 각도의 Y자 책상을 두고 토론자와 사회자 모두 앉아 질문과 대답을 하였으며, 3차는 두 토론자를 위해 간이 의자를 마련한 후 한 후보자가 대답하면 다른 후보자는 의자로 가서 앉는 방식을 취하였다. 토론 참가자는 여론 조사에서 15% 이상 지지를 받은 후보라로 법조문상 명문화 되어 있다. 이에 대해 15% 미만 지지자들이 법정 소송을 제기한 적도 있지만 패소하였다. 이 토론에서 패트 부캐넌(Pat Buchanan) 개혁당 후보와 녹색 당 후보 랄프 네이더(Ralph Nader)는 토론에 초청받지 못하고 토론이 열리는 도시에서 장외 투쟁을 하기도 했다. 15% 이상 지지를 얻고 있는 후보자간에 펼쳐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은 선거 캠페인의 꽃이다. 2월에서 8월에 걸친 각 당 예비 선거가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라면 8월에 열린 전당 대회는 출정식과도 같은 것이며 이어 열리는 토론은 선거 캠페인의 최대 격전장이다. 선거 토론이 열세 후보에게는 선두를 탈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우세 후보에게는 승리를 굳히는 분수령이 되기도 한다. 선거 토 론은 11월 첫째 주 화요일에 벌어질 대선에서의 승리로 이르는 정치적 이정 표이다. 지난 20년 간 미국 대선 토론은 한 회당 6,000만 명이 넘는 시청자들을 끌어들였으며 올해는 4,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의 시청자들이 대선 토론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은 아직 토론으로서 미비점이 없지 않지만 언론이나 선거 대변인을 통한 간접적 메시지보다 후보자들의 정책과 비전을 유권 자들이 직접 전달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민주적 선거의 중요한 절차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후보자 역시 토론을 통해 상대 후보의 정책보다 자기의 정책이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동시에 국가 경영 능력과 행정 수행 능력이 상대 후보보다 자기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2) 아카데미식 토론의 발달

지금까지 미국 정치 토론의 발달을 통해 토론의 정치적 기능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시대부터 발달한 미국 대학은 18세기 초에 토론 동아리와 클럽 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아카데미식 토론은 1826년 매사추세츠주에서 일어난 리시움(Lyceum)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지식인, 정치인, 법조인 등 사회 의 다양한 계층이 모여 스터디 그룹을 형성한 이 운동은 리시움이라는 말 그대로 스피치와 토론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서로 논의하는 활동을 말했다. 183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무려 3,000개가 넘는 리시움이 생겨 났다.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토론 클럽들이 형성되었다. 아카데미식 토론은 19세기 말경 시작되었으며 몇몇 대학은 인접한 타 대학과 대학간 토론 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만 해도 일년에 몇 회에 불과했다. 20세기 초반인 1920년대에 들어와 토너먼트 형태의 토론 대회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아카데미식 토론 대회가 정착하게 되었고 1930년 대엔 전국적으로 번지게 되었다. 토론 팀은 인접 대학까지 주로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하였으며 하루에 한 번 정도 토론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당시 누가 긍정측을 하느냐 부정측을 하느냐, 기숙사와 토론 장소는 어떻게 결정하느냐, 누가 심판을 하느냐 등 각 대학간의 협상에 대한 기록이 풍부히 남아 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0년대에는 일시 중단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47년 미국 최초로 전국 대학 토론 토너먼트(National Debate Tournament :NDT)가 열리게 되자 대학에서의 토론 문화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각 대학의 토론 동아리는 인접한 대학과 서로 연중 내내 토론을 열어 미국 대학에서 토론은 매주 펼쳐지는 정기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토론 팀은 학교 버스나 토론 팀 소속 버스로 수업이 없는 주말에 이동 하였다. 현재 3,000여 개의 미국 대학에 토론 팀이 없는 학교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학교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참여 학생의 전공은 인문계 자연계 구분이 없이 다양하며 특히 자연계 학생의 토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자연 계열 단과 대학이 개별적으로 교과 과정에 토론 과목을 교양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고 있다. 1947년 미국 토론 학회(American forensics Association :일명 AFA)가 전국 대학생 토론 대회(National Debate Tournament)를 주관하면서 일반인들에 게도 대학 토론 대회가 알려지게 되었다. 1960년대 NDT는 주로 정책과 관련된 2∼3개의 주제로 토론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당시의 주 토론 방식을 NDT 방식이라 한다. 이후 1971년 또 다른 전국 토론 대회가 열렸는데, 이름을 'Cross Examination Debate Association'이라 했으며 이후 'CEDA'라는 약칭으로 많이 불려지게 되었다. CEDA란 교차 조사 토론 모임, 혹은 토론 학회 모임이란 뜻으로도 쓰이며, 토론 방식을 일컫는 말로도 쓰이는 다의적 용어가 되었다. 처음에 CEDA는 NDT와 달리 정책보다 가치를 토론의 주제로 많이 정했으며 방식도 교차 조사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후 1970년대 후반엔 CEDA도 정책을 토론 주제로 삼게 되고, NDT도 교차 조사 방식의 토론 형식을 채택하면서 NDT와 CEDA의 구분이 불분명하게 된다. 지금은 교차 조사 방식의 토론을 일반적으로 CEDA 방식이라 하며 2000년 12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전국 대학생 토론 대회도 이 형식의 일종이었다. 이후 1985년 American Debate Association(ADA)이 새로 태동하게 되어 미국에서 전국적 규모의 대학 토론 학회는 3개가 되었다. NDT와 ADA 주최 토론 대회는 여전히 정책 주제를 토론 논제로 하고 있으며 CEDA는 가치 주제를 토론 논제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토론 주제는 정책과 가치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관점을 잘 분석하여 토론에 이용하는 사람이 유능한 토론자라 할 수 있다.  

5, 중국과 일본의 토론의 역사

중국과 일본에서도 토론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하였지만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1990년대 들어 중국, 대만, 홍콩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대 중국에서 토론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토론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 백가들의 토론에 대한 연구가 서구에 많이 소개되고 있다. 공자, 노자, 장자의 토론에 대한 방법과 기법들을 서구의 개념으로 재 해석하는 작업 역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1850년대에 서구 국가들에게 전면적 개방을 하면서 당시 일본인 몇 명을 서방 국가에 시찰보냈다.
즉, 신사 유람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유키치 후쿠자와(Yukichi Fukuzawa)라는 이가 몇 개월에 걸 친 시찰 경험을 『서유견문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당 시 일본인에 비쳐진 서양의 문화를 심층 분석한 책으로 현재까지도 일본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영국 의회와 프랑스 의회를 관람한 후쿠자와는 이 책에서 서구 문명의 원동력을 토론과 스피치 문화로 파악하였다. 후쿠자와는 귀국 후 토론과 스피치 클럽을 설립하여 토론과 스피치를 일본에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으로 1887년 모든 정치적 스피치 클럽과 토론 클럽은 폐쇄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패망 까지 스피치와 토론에 대한 교육은 사라지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토론과 스피치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여 고등 교육에 포함시켰으며, 이후 일본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토론 동아리를 육성하였다. 한편 1970년대부터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는데, 입상한 학생들은 미국 학교와 유럽 학교를 순방하면서 미국 학생과 유럽 학생들과 토론 대회를 열고 있다.  

6. 한국 토론의 역사

타 문명과 같이 한반도에도 수준 높은 문명이 존재하였으며 다양한 형태의 토론이 존재했지만 중국이나 일본처럼 토론을 학문의 한 분야로 인식하지 않았다. 절대 왕정을 오랫동안 유지하였기 때문에 토론이 민중들에게 교육 의 방법으로나 정치적 도구로서 기능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한국 역사에서도 토론이 활발했다는 증거가 역사의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정책 결정을 하는 엘리트 집단의 정책 결정 토론은 고려 왕조 실록이나 조선 왕조 실록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을 토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다. 정치 토론 외에도 종교적, 이념적, 정책적 토론 역사에 관한 기록은 풍부하다. 예를 들어 고려 시대의 불교 종파들간의 논쟁은 돈오돈수 이론과 돈오점수 이론으로 나뉘어 지금도 토론이 계속되고 있으며, 척화파와 강화파의 토론 및 십만양병설에 대한 찬반 토론 등은 정책 토론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율곡 선생과 퇴계 선생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지적 토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왕조 실록과 조선 왕조 실록은 정책 토론과 가치 토론 연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사료들을 토론학적 관점에서 재고찰함으로써 한국 토론학의 전통을 밝히는 작업이 시급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5대 대통령 선거부터 후보자들간의 직접 토론회가 개최 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정치적 과정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도 반대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못할지라도, 반대 의견의 존재성을 수용할 줄 아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즉, 반대 의견을 꼭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 의견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존중할 줄 아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올바른 토론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토론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은 없는 실정이다. 학생들의 사고력과 문장력을 측정하기 위해 대학 입시에 논술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논술 못지않게 논변[論辨 :말할 논(論), 분별할 변(辨)]도 중요하다. 특히 구어적 의사 소통이 주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대에서 자기의 주장과 의견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소양이 글 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다. 논변력을 향상시키는 토론 교육이 잘 되면 많은 사회 기관의 모습이 또한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사법 기관의 모습이 달라지고, 변호사 역시 '문호사(文護士)'가 아닌 진정한 변호사[(辯護士):말 잘할 변(辯)]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한국 역사를 살펴보면 구한말 독립협회는 토론을 중시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 민주주의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토론이 환발히 이루어져 왔다. 1987년 6월 민중 항쟁 이후 공공 토론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텔레비전 등과 같은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형태의 토론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 교육 현안에 대한 각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학교 교육에서 토론 교육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초중고와 대학교에서 토론식 수업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체계적으로 토론을 지도할 수 있는 인력이나 여건이 턱없이 부족하다. 토론 교육을 지도할 수 있는 인원 양성과 토론 교육의 제도화 및 교육 자료 개발에 창의 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기업에서도 토론을 잘 이용하면 신입사원 선발시 보다 창의적이고 지적이며 분별력 높은 사람들을 인재로 채용할 수 있을 것이다.  

7. 맺는말
토론의 장점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지식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기존의 교육이나 책, 정보 등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매체라면 토론은 그 지식들을 서로 대화와 글로서 이해를 풀고 질문을 하며 설득을 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인터랙티브(상호작용)한 장이다...
엄청난 양의 정보홍수 속에서 스폰지 처럼 무조건적으로 지식을 받아드리기만 하는 지식인 보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비교 분석하여 분별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신지식과 신 패러다임이 우리 국민에게 필요하다. 이에 토론실닷컴은 한국의 토론문화를 위해 한층 더 노력할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드리는 바이다.  

출처: 토론의방법/강태완, 김태용, 이상철, 허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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