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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400년만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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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수년전 임진년에 침공한 왜병이
평양을 점거하자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한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탈환,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총대장 우키다는 참모회의를 열고 한양에 머물러 고수하는 안,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안,
한양을 포기하고 남으로 철수하는 세 가지 안을 놓고
의논한 끝에 북진하는 안을 택한다.
이 북진 주력을 행주산성에서 맞아 싸운 것이
호남 병력을 이끌고 상경한 전라 순찰사 권율 장군이다.
왜군은 우키다 총대장을 비롯, 고니시 구로다 등 명장들이 3만 병력을
일곱 방면군으로 나누어 겨우 2000 병력이 지키고 있는 산성을 포위 공략해왔다.
얼굴에 귀면 수면의 탈을 쓰고 내성에 몰려드는 것을
권율 장군의 발검 진두독전으로 배수진법으로 격퇴시킨 것이다.
「일월록」에 보면 「날이 어두울 무렵에 일본 장수 우키다가 흐르는 살에 맞아 달아나니
행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길에 적군의 시체가 줄줄이 이어졌었다」했다.
산성에서는 왜군 시체를 거두어 네 무더기로 나누어 쌓아놓고 불을 질렀는데
그 냄새가 수십리 안을 사흘동안이나 진동시켰다고도 했다.
이런 참사가 있은지 400여년 후인 엊그제 21일 행주산성에서 색다른 만남이 있었다.
바로 승장인 권율 장군의 후손과 패장인 우키다 총대장의 후손이 화해의 만남을 가진 것이다.
이 모임에는 유성룡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며, 벽제대패때 왜군의 주장이던
다치바나의 후손 등 한-일 장군들의 후손들 70여명이 함께 한 자리에서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를 하고 대물린 응어리를 풀었다.
400여년전 잘못을 사죄했다 하니 수일 전 종군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일본을 상대로 한 6년반에 걸친 소송 공판이 생각난다.
사죄한다는 말만이라도 듣고싶다는 인도재판인데,
시작하자마자 재판 청구를 기각한다로 묵살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의 사죄는 공사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행주산성의 사죄다.
평양을 점거하자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한
명나라 원군이 평양을 탈환,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총대장 우키다는 참모회의를 열고 한양에 머물러 고수하는 안,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안,
한양을 포기하고 남으로 철수하는 세 가지 안을 놓고
의논한 끝에 북진하는 안을 택한다.
이 북진 주력을 행주산성에서 맞아 싸운 것이
호남 병력을 이끌고 상경한 전라 순찰사 권율 장군이다.
왜군은 우키다 총대장을 비롯, 고니시 구로다 등 명장들이 3만 병력을
일곱 방면군으로 나누어 겨우 2000 병력이 지키고 있는 산성을 포위 공략해왔다.
얼굴에 귀면 수면의 탈을 쓰고 내성에 몰려드는 것을
권율 장군의 발검 진두독전으로 배수진법으로 격퇴시킨 것이다.
「일월록」에 보면 「날이 어두울 무렵에 일본 장수 우키다가 흐르는 살에 맞아 달아나니
행주로부터 한양에 이르는 길에 적군의 시체가 줄줄이 이어졌었다」했다.
산성에서는 왜군 시체를 거두어 네 무더기로 나누어 쌓아놓고 불을 질렀는데
그 냄새가 수십리 안을 사흘동안이나 진동시켰다고도 했다.
이런 참사가 있은지 400여년 후인 엊그제 21일 행주산성에서 색다른 만남이 있었다.
바로 승장인 권율 장군의 후손과 패장인 우키다 총대장의 후손이 화해의 만남을 가진 것이다.
이 모임에는 유성룡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며, 벽제대패때 왜군의 주장이던
다치바나의 후손 등 한-일 장군들의 후손들 70여명이 함께 한 자리에서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를 하고 대물린 응어리를 풀었다.
400여년전 잘못을 사죄했다 하니 수일 전 종군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일본을 상대로 한 6년반에 걸친 소송 공판이 생각난다.
사죄한다는 말만이라도 듣고싶다는 인도재판인데,
시작하자마자 재판 청구를 기각한다로 묵살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의 사죄는 공사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행주산성의 사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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