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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톨스토이의 문학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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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그는 문호이기 이전에 사도(使徒)였고, 인생의 교사였고,
시대의 양심이었고, 그리고 위대한 성자(聖者)였다.
그가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비도덕적인 처사에
비폭력으로 저항하자 일부에서 그를 체포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으나
농민들은 [톨스토이를 가둘만한 큰 감옥은 러시아에 없다]며,
자신들마저 되려 감옥에 갈 것을 요구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약 2백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야스나야 팔랴나를 계절에 맞춰 세 차례나 방문했었다.
미국인 인투리스트(여행자) 편에 끼어 가기도 하고,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 학생들과 함께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역시 혼자서 그의 성지(聖地)를 찾아갈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영지 산책로 맨 끝 부분에 아무 말없이 누워 있었다.
항상 자연인이 되어 "가난하거라, 거지가 되거라"며
끊임없이 자기를 벗기던 구도자의 모습이 아무 허식도 걸치지 않은 채
흔한 묘비 하나없이 풀잎처럼 누워 있다.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 만큼 자신의 생애와 직접 관련된 작가도 아마 드물 것이다.
그는 직접 땅을 파고 밭을 일구며 틈틈이 글을 썼다.
그는 80평생을 사는동안 50년 이상을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보내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이곳에서 잉태시키고 집필하였다.
자신의 가계(家系)와 영지 주민,
그리고 야스냐야 팔랴나의 자연환경이
그의 작품 속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톨스토이 자신도
"야스나야 팔랴나 없이 나는 러시아를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이곳 생활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거기다 창작의 기쁨과 고통을 맛보면서
한편으로 가정의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맛본 곳도 이곳이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몰이해와 수모를 당한 곳도 이곳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그의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지성인, 학자, 화가, 작가, 작곡가 할 것 없이 다 이곳에 모여 들었다.
어느 작가는 "지구의 정신적 자오선은 야스나야 팔랴나를 지나간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톨스토이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모스크바로 나온 것은 1881년이었다.
이듬해 하모프니카 거리의 집을 한 채 사, 그는 겨울이면 이곳에서 작품을 썼다.
지금은 톨스토이 기념관으로 바뀐 빨간색 목조의 2층 단독건물이다.
2층 계단 옷걸이에는 아직도 톨스토이가 입던 털 외투가 그대로 걸려 있다.
안톤 체홉, 막심 고리키 등의 작가와 림스키 코르샤코프, 라흐마니노프 등
음악가가 찾아와 함께 앉았던 소파도 그대로 남아있다.
2층 맨 끝방이 그의 서재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부활]을 썼다.
[부활]은 톨스토이가 코니라는 친구한테서 들은 실화를 기록한 것으로
러시아 부인에게 양녀로 온 고아소녀 로잘라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줄거리다.
[부활]하면 카튜사와 황량한 설원 시베리아를 연상한다.
카튜사가 유형살이를 하던 곳이 어딘지 궁금하다.
카튜사가 재판을 받는 장면과 죄수 생활을 하던 곳도 어딘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모스크바, 툴라, 크라피브나 등의
교도소를 수도 없이 찾아가 범죄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했다고 한다.
스카프로 머리를 싸 맨 [부활]의 여주인공 카튜사는
세계의 모든 문학애호가에 의해 지금도 구원의 여인으로 남아있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줄 때까지 교정을 봤다고 한다.
더 고칠 시간을 주지않고 빼앗아간다고 투덜대던 그였다.
그만큼 작품을 위해 최후까지 여러 각도로 생각하던 톨스토이였다.
1910년 톨스토이는 부인과의 불화로 가정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자
갑자기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가출했다.
우랄선 3등열차를 타고가다 감기에 걸려 내린 곳이 야스타포보 역이었다.
그는 이 역의 역장 관사에서 치료를 받다가 절명했다.
레닌은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지나치게 믿는 지주 출신"이라고 평가했다.
"악을 힘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말은 스탈린의 비위를 건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 때는 물론 지금도 톨스토이의 작품은 학교(쉬꼴라) 교과서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이 실려 있다.
그가 1백 년 전에 부르짖었던 작품속에 나타난 설교들이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인생의 탐구자, 구도자로서 전 인류를 대신해 고뇌했던 사람,
만년에 그의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귀 기울였던 소리가 지금도 헛되지 않은 것을 보니
분명 톨스토이는 우리의 성자였음이 틀림없다.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장미꽃을 그의 무덤앞에 꽂아놓고
"가난하거라, 거지가 되거라"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톨스토이의 세계(世界)
레프 니콜라이 톨스토이(1828-1910)는
중부 러시아 툴라 현의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러시아 굴지의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잔대학에서 동양어를 공부하다가 법학으로 전과하여 수학했으나 결국 중퇴하고
스스로 독서에 열중하며 자기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1854년 포병장교로 아르메니아 세바스토폴리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유럽 여행 뒤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만년을 보냈다.
농민 교육에 앞장서 문맹퇴치 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스스로 농노를 폐지하고 정부의 착취, 만연된 폭행,
교회의 비리 등 부도덕한 모습에 강력히 항의하는 글들을 발표키도 했다.
톨스토이의 세계는 무폭력·무저항주의, 도덕적인 자기완성, 검소한 생활 등이 특징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의 대작들로 있으나
[참회록] [나의 신앙] [인생론] 등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인생의 사도, 시대의 양심으로 지금도 우뚝 서 있다.
그는 문호이기 이전에 사도(使徒)였고, 인생의 교사였고,
시대의 양심이었고, 그리고 위대한 성자(聖者)였다.
그가 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비도덕적인 처사에
비폭력으로 저항하자 일부에서 그를 체포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으나
농민들은 [톨스토이를 가둘만한 큰 감옥은 러시아에 없다]며,
자신들마저 되려 감옥에 갈 것을 요구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약 2백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야스나야 팔랴나를 계절에 맞춰 세 차례나 방문했었다.
미국인 인투리스트(여행자) 편에 끼어 가기도 하고,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 학생들과 함께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역시 혼자서 그의 성지(聖地)를 찾아갈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영지 산책로 맨 끝 부분에 아무 말없이 누워 있었다.
항상 자연인이 되어 "가난하거라, 거지가 되거라"며
끊임없이 자기를 벗기던 구도자의 모습이 아무 허식도 걸치지 않은 채
흔한 묘비 하나없이 풀잎처럼 누워 있다.
톨스토이의 예술 세계 만큼 자신의 생애와 직접 관련된 작가도 아마 드물 것이다.
그는 직접 땅을 파고 밭을 일구며 틈틈이 글을 썼다.
그는 80평생을 사는동안 50년 이상을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보내면서
대부분의 작품을 이곳에서 잉태시키고 집필하였다.
자신의 가계(家系)와 영지 주민,
그리고 야스냐야 팔랴나의 자연환경이
그의 작품 속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톨스토이 자신도
"야스나야 팔랴나 없이 나는 러시아를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이곳 생활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거기다 창작의 기쁨과 고통을 맛보면서
한편으로 가정의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맛본 곳도 이곳이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몰이해와 수모를 당한 곳도 이곳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그의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지성인, 학자, 화가, 작가, 작곡가 할 것 없이 다 이곳에 모여 들었다.
어느 작가는 "지구의 정신적 자오선은 야스나야 팔랴나를 지나간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톨스토이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모스크바로 나온 것은 1881년이었다.
이듬해 하모프니카 거리의 집을 한 채 사, 그는 겨울이면 이곳에서 작품을 썼다.
지금은 톨스토이 기념관으로 바뀐 빨간색 목조의 2층 단독건물이다.
2층 계단 옷걸이에는 아직도 톨스토이가 입던 털 외투가 그대로 걸려 있다.
안톤 체홉, 막심 고리키 등의 작가와 림스키 코르샤코프, 라흐마니노프 등
음악가가 찾아와 함께 앉았던 소파도 그대로 남아있다.
2층 맨 끝방이 그의 서재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부활]을 썼다.
[부활]은 톨스토이가 코니라는 친구한테서 들은 실화를 기록한 것으로
러시아 부인에게 양녀로 온 고아소녀 로잘라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줄거리다.
[부활]하면 카튜사와 황량한 설원 시베리아를 연상한다.
카튜사가 유형살이를 하던 곳이 어딘지 궁금하다.
카튜사가 재판을 받는 장면과 죄수 생활을 하던 곳도 어딘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모스크바, 툴라, 크라피브나 등의
교도소를 수도 없이 찾아가 범죄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했다고 한다.
스카프로 머리를 싸 맨 [부활]의 여주인공 카튜사는
세계의 모든 문학애호가에 의해 지금도 구원의 여인으로 남아있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줄 때까지 교정을 봤다고 한다.
더 고칠 시간을 주지않고 빼앗아간다고 투덜대던 그였다.
그만큼 작품을 위해 최후까지 여러 각도로 생각하던 톨스토이였다.
1910년 톨스토이는 부인과의 불화로 가정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자
갑자기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가출했다.
우랄선 3등열차를 타고가다 감기에 걸려 내린 곳이 야스타포보 역이었다.
그는 이 역의 역장 관사에서 치료를 받다가 절명했다.
레닌은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지나치게 믿는 지주 출신"이라고 평가했다.
"악을 힘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말은 스탈린의 비위를 건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 때는 물론 지금도 톨스토이의 작품은 학교(쉬꼴라) 교과서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이 실려 있다.
그가 1백 년 전에 부르짖었던 작품속에 나타난 설교들이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다.
인생의 탐구자, 구도자로서 전 인류를 대신해 고뇌했던 사람,
만년에 그의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귀 기울였던 소리가 지금도 헛되지 않은 것을 보니
분명 톨스토이는 우리의 성자였음이 틀림없다.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장미꽃을 그의 무덤앞에 꽂아놓고
"가난하거라, 거지가 되거라"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톨스토이의 세계(世界)
레프 니콜라이 톨스토이(1828-1910)는
중부 러시아 툴라 현의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러시아 굴지의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잔대학에서 동양어를 공부하다가 법학으로 전과하여 수학했으나 결국 중퇴하고
스스로 독서에 열중하며 자기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1854년 포병장교로 아르메니아 세바스토폴리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유럽 여행 뒤 야스나야 팔랴나에서 만년을 보냈다.
농민 교육에 앞장서 문맹퇴치 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스스로 농노를 폐지하고 정부의 착취, 만연된 폭행,
교회의 비리 등 부도덕한 모습에 강력히 항의하는 글들을 발표키도 했다.
톨스토이의 세계는 무폭력·무저항주의, 도덕적인 자기완성, 검소한 생활 등이 특징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의 대작들로 있으나
[참회록] [나의 신앙] [인생론] 등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비판하면서 인생의 사도, 시대의 양심으로 지금도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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