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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주시용의 '명태대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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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기회를 잡아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옛말이 있나 봅니다.
구한말 시대 ‘명태 대왕’이라 불리며 조선 어업을 주름잡던 주시용은
다른 사람이 버린 실그물 하나로 거부가 된 사람이다.
그는 1848년 경남 창원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꼴망태를 메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탓하지 않고 성실히 일했던 그는 서른 살 무렵
함경도의 바닷가에 조그만 어물 객주를 열게 되었습니다.
1896년 어느 날,
명태를 잡으러 온 일본 어부 한 사람이 주시용의 객주에 들어와서 묵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그 어부는 명태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살을 에는 듯한 동지 섣달 찬바람에 꽁꽁 언 동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밀린 밥값도 못 낼 만큼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주시용은 3원을 선뜻 내주며
고향으로 돌아갈 여배에 보태 쓰라고 했습니다.
일본 어부는 고마워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기가 가지고 왔던 그물을 주시용에게 주고는 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물이 주시용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 줄 줄이야.
주시용은 심심풀이로 그물을 들고 바다에 나갔습니다.
하루 이틀은 아무런 소득이 없더니 며칠이 지나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명태 떼가 밀려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나무 발로 낚시를 하던 시절이었고,
그물이라고는 고작 칡덩쿨이나 새끼로 역은 것이 전부였던 터라
이때부터 주시용은 일본 어부가 주고 간 현대식 실그물을 이용해
앞바다에 살고 있는 무진장한 명태를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땅 한마지기도 물려 받지 못한 미천한 처지에서
큰 부자로 일어서기까지 남 모르는 고난과 쓰라린 기억들이 가득한 그였지만,
62세가 되던 1909년에는 1천 석의 땅을 전부 자선 사업에 아낌없이 내놓았고,
이에 감격한 마을 사람들은 신문에다 그의 덕을 기리는 광고까지 냈다고 합니다.
좋은 생각 1999. 10월호
그래서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옛말이 있나 봅니다.
구한말 시대 ‘명태 대왕’이라 불리며 조선 어업을 주름잡던 주시용은
다른 사람이 버린 실그물 하나로 거부가 된 사람이다.
그는 1848년 경남 창원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꼴망태를 메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탓하지 않고 성실히 일했던 그는 서른 살 무렵
함경도의 바닷가에 조그만 어물 객주를 열게 되었습니다.
1896년 어느 날,
명태를 잡으러 온 일본 어부 한 사람이 주시용의 객주에 들어와서 묵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그 어부는 명태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살을 에는 듯한 동지 섣달 찬바람에 꽁꽁 언 동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밀린 밥값도 못 낼 만큼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주시용은 3원을 선뜻 내주며
고향으로 돌아갈 여배에 보태 쓰라고 했습니다.
일본 어부는 고마워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기가 가지고 왔던 그물을 주시용에게 주고는 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물이 주시용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 줄 줄이야.
주시용은 심심풀이로 그물을 들고 바다에 나갔습니다.
하루 이틀은 아무런 소득이 없더니 며칠이 지나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명태 떼가 밀려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나무 발로 낚시를 하던 시절이었고,
그물이라고는 고작 칡덩쿨이나 새끼로 역은 것이 전부였던 터라
이때부터 주시용은 일본 어부가 주고 간 현대식 실그물을 이용해
앞바다에 살고 있는 무진장한 명태를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땅 한마지기도 물려 받지 못한 미천한 처지에서
큰 부자로 일어서기까지 남 모르는 고난과 쓰라린 기억들이 가득한 그였지만,
62세가 되던 1909년에는 1천 석의 땅을 전부 자선 사업에 아낌없이 내놓았고,
이에 감격한 마을 사람들은 신문에다 그의 덕을 기리는 광고까지 냈다고 합니다.
좋은 생각 1999.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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