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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시험 논술시험 읽기 자료: 논리와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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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論理)라는 말은 <말의 이치>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되어 있다.
예컨대 ‘물리(物理)’ 는 물질들이 변화하고 작용하는 이치를 다루는 것이요, 논리는 말로써 따질 때 따라야 할 이치를 다루는 것이다. 또 ‘논리’에 해당되는 영어 ‘logic’도 역시 ‘말’을 뜻하는 희랍어 ‘log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원적으로 보면 논리란 ‘말’에 관한 것이며 ‘말의 이치’를 따지는 것이다.
<논리적>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고 따져보고 탐구하고 논쟁하고 등등의 다양한 상황 하에서 요구되는 어떤 이치 내지 규칙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논리가 요구하는 이러한 이치 내지 규칙이란 무엇인가? 만일 누군가 ‘플라톤은 총각이다’는 말에 동의했다면 그는 ‘플라톤은 남자다’는 말에 대해서도 동의해야 한다.
‘플라톤은 총각이다’는 명제는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 지켜져야 하는 이치도 있을 것이다. 또 플라톤이 총각이라는 명제는 상황에 따라서 매우 적합하지 않은 진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황에 적합한 진술이 되기 위해서 지켜져야만 하는 이치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논리가 요구하는 이치는 이런 많은 이치들 중의 한가지이다.
그러나 어쨌든 만일 내가 ‘플라톤은 총각이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나는 ‘플라톤은 남자다’는 말에 대해서도 동의해야 한다. 또 ‘칼 루이스가 빨리 달리고 있다’고 인정한 사람은 ‘칼 루이스가 달리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 ‘지구는 둥글다’고 믿는 사람은 ‘지구는 네모지다’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논리가 요구하는 <말의 이치>이다. 너무 뻔한 얘기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논리란 아무리 높은 수준의 논리학에서도 이러한 시시한 얘기에서 드러나는 뻔한 이치를 다룬다. 이것이 바로 논리적 사고의 요점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뻔한 이치를 잘 지킨다고 해서 올바르게 말하고 사고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플라톤의 키가 2미터보다 크다면 플라톤의 키는 199 센티미터보다 크다; 만일 플라톤의 키가 199 센티미터보다 크다면 플라톤의 키는 198.5 센티미터보다 크다” 등등. 늘 이런 계산만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논리적 이치에 맞는 사고를 하면서도 평생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셈이고, 따라서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신병 환자일 것이다.
논리적 이치를 다 지킨다고 해서 곧바로 올바른 말, 제대로 된 사고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플라톤의 키가 180 센티미터보다 크다>와 <플라톤의 키가 160 센티미터보다 작다>를 동시에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올바른 사고일 수가 없다. 논리적 이치를 어기고서는 결코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논리가 요구하는 이치는 올바른 사고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리는 흔히 ‘논리적 사고’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심오하고 통찰력 있는 사상적 업적을 이룩했던 위대한 사상가나 과학자를 떠올리거나, 실낱같은 단서를 포착해서 범인을 찾아내는 셔얼록 호움즈 같은 명탐정을 연상한다. 그런 재주로 말하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논리적 사고라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매우 어려운 것이리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논리적 사고란 보통 사람에 비해서 뛰어난 사고력이나 지능을 가진 사람들, 또는 많은 공부를 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논리적 사고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실제로 누구나 늘 논리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30분이 걸리는데 1교시 시작 20분전에 집에서 출발하는 경우에 우리들 대부분은 불안과 초조감에 휩싸인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도 <학교에 지각하게 되리라>고 이미 추리해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추리는 우리가 전혀 하고 싶어하지 않는데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친구들도 가끔 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이 다른 점은 그 정도의 추리를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 꾸지람 듣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정도의 용기(?)를 가졌다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능력’이라는 표현은 과장도 아니고 공치사도 아니다.
실제로 최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루하고 복잡한 계산을 그렇게 쉽게 해내는 컴퓨터가 사람들이 쉽게 처리해내는 일상적인 일들에 있어서 얼마나 바보인가 절실히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매우 논리적인 동물인 것이다.
논리가 말의 이치를 다루기는 하지만 모든 말의 모든 이치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한다. 다양한 상황과 목적들의 차이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아채기 때문에 보통은 의식하지도 않는다. 몇 주만에 만난 그다지 친하지 않는 친구가 “그동안 잘 지냈니?”하고 묻는데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미주알 고주알 풀어놓는 사람이라면 사람 상대하는 직업은 포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연극배우에게 맑은 날씨에 거짓말한다고 비난하지도 않으며 “통곡하는 바위”를 노래하는 시인에게 엉터리라고 말의 이치를 들이대지도 않는다.
논리적인 원칙이 요구되는 상황이란 언제나 진리주장(truth-claim)이 제시되는 상황이다.
누가 무엇이 어떻다고 주장할 때에 비로소 논리적인 이치를 따질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논리가 적용될 여지는 많지 않다. 아인쉬타인이 <태양 근처에서 빛이 휠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바빠진 것은 천문학자요 물리학자들이었지 논리학자들이 아니었다. 논리적인 원칙이 적용되려면 진리주장이 있되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 내지 근거들도 함께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논증 = 주장 + 근거들
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예를 들어서 낡은 모자를 발견한 셔얼록 호움즈와 왓슨 박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한 낡은 모자를 잠시 들여다보던 셔얼록 호움즈는 왓슨에게 <이 모자의 주인은 매우 지적(intellectual)인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왓슨에게 호움즈가 붙인 이유는 <머리가 크면 그만큼 든 것도 많은 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장면쯤 되면 논리적인 이치를 따질만한 재료가 제공되어 있다. 호움즈는 왓슨에게 어떤 진리주장(=이 모자의 주인은 매우 지적인 사람이다)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머리가 크면 든 것도 많다)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주장이 근거들과 함께 제시될 때 우리는 그것을 논증(argument)이라고 부른다. 논리란 좋은 논증이 갖추어야 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요. 논리학이란 바로 이러한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논리가 말하는 이치를 따지려면 반드시 논증적인 말이나 글, 즉 이유 내지 근거를 들어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말이나 글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논증적인 글이란 진리주장과 근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글이다. 어떤 글이 내세우는 진리 주장을 <논지>, <결론>, <주장> 등의 말로 부르기도 하며 근거를 <논거>, <전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논증적인 글이 주어지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글의 주장, 즉 결론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거야 국어시간에 많이 해 본 일 아닌가? 두괄식이니 미괄식이니 또 무슨 괄식이니 하는 게 바로 이런 얘기였다. 글 자체가 난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문제는 쉽다. 이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태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하여 완벽하게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 읽는 모든 글을 연습문제로 삼을 수 있다. 글들을 문단마다 나누어서 생각하라. 그리고 각 문단에 대해서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하고 물어보라..
일반적으로 ‘왜냐하면’, ‘···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유인 즉슨’, ‘···과 같은 점을 생각하건대’, ‘첫째···, 둘째···’, ‘예컨대’ 등의 말들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붙는다. 논증적인 글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그러므로’, ‘고로’, ‘따라서’, ‘요컨대’, ‘간단히 말해서’, ‘결과적으로’, ‘내 생각으로는’, ‘사실’, 등등의 말로 시작하거나 ‘···로부터 다음을 알 수 있다’, ‘···는 ― 를 보여준다’, ‘···는 점은 명백하다’ 등의 구절로 장식되어 있다. 이런 표현들에 주의하면 주장을 분별해내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의 일부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이런 말들이 주어진 글의 최종적 결론을 언제나 잘 가려내 주는 것도 아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글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글은 어떤 문제(issue)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독서의 여러 종류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이라면 “독서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며 이러한 글이 경우에 따라서 택해야 할 독서방법을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있다면 이 글은 “어떤 방법으로 독서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신문의 기사문이나 전자제품의 매뉴얼조차도 어떤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설명문이나 묘사문, 또는 기록문 등에 대해서는 문제는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주장을 찾을 수는요약되어 없다.
주장을 담고 있는 글이라면 그것은 이미 논증적인 글이 될 것이다.
논증적인 글의 경우에 주장이란 그 논증이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니 논증적인 글을 대할 때 글의 문제와 주장을 함께 찾아보려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 글의 문제는 제목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고 글의 서두에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은 문제를 명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으므로 글의 시작 부분을 중심으로 삼아서 독자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때에 따라서 논증이랍시고 제시된 글의 주장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그 글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 문제와 주장이 불분명한 글은 물론 좋은 글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의 경우에도 아무런 문제도 다루고 있지 않다기보다는 여러 개의 문제와 주장들이 섞여 있기가 십상이다.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애매한 글의 문제와 주장들도 정리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쯤 되면 치밀하게 읽는 훈련을 꽤 거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문제와 주장이 선명한 글들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하자면 논리적 사고란 화자 내지 필자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문제와 주장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말이나 글의 경우에는 문제와 주장을 가려내는 일조차도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요컨대 독서력 내지 독해력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글을 대할 때는 늘 문제와 주장을 잡아내려는 태도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읽자.
질문1: 이 글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2: 이 글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우에 따라서 글의 문제와 주장은 글 안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밑줄 긋는 것으로 문제파악, 주장파악이 해결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글을 읽고 자신의 문장으로 요약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글의 문제는 물론 의문문으로 표현될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글의 요점을 정리해내는 훈련이야말로 논리적 사고를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몇 가지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다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크리톤이라는 친구가 한 말이다. 이 글에서 크리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크리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
크리톤: ···그러나 이보게 소크라테스, 자네가 내 충고를 듣고 탈출하기에 아직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닐세. 자네의 죽음은 나에게는 이중의 재난이 될 걸세. 자네가 죽는다면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낼 수 없을 친구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자네와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자네를 위해서 돈을 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자넬 틀림없이 구할 수 있었을 테니 내가 자넬 죽인 셈이라고 생각할게 틀림없지 않은가?
친구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평판을 듣기보다 더 경멸 당할 일이 어디에 있겠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자넬 설득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이곳을 떠나기를 거절한 것은 바로 자네 자신이었다는 것을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네.
이 글에서 크리톤이 문제삼는 것은 무엇이며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탈출할 것을 매우 간절하게 권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의 문제는 <소크라테스는 탈옥해야 하는가?>하는 것이요, 이 글에서 크리톤의 주장은 <소크라테스는 탈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논증적인 글에서 주장이란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 두자.
민찬홍 (한남대 교수)
정보출처: 동원고등학교 국어과 (창의력 신장을 위한 수준별 논술 읽기 자료 모음)
예컨대 ‘물리(物理)’ 는 물질들이 변화하고 작용하는 이치를 다루는 것이요, 논리는 말로써 따질 때 따라야 할 이치를 다루는 것이다. 또 ‘논리’에 해당되는 영어 ‘logic’도 역시 ‘말’을 뜻하는 희랍어 ‘log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원적으로 보면 논리란 ‘말’에 관한 것이며 ‘말의 이치’를 따지는 것이다.
<논리적>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고 따져보고 탐구하고 논쟁하고 등등의 다양한 상황 하에서 요구되는 어떤 이치 내지 규칙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논리가 요구하는 이러한 이치 내지 규칙이란 무엇인가? 만일 누군가 ‘플라톤은 총각이다’는 말에 동의했다면 그는 ‘플라톤은 남자다’는 말에 대해서도 동의해야 한다.
‘플라톤은 총각이다’는 명제는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 지켜져야 하는 이치도 있을 것이다. 또 플라톤이 총각이라는 명제는 상황에 따라서 매우 적합하지 않은 진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황에 적합한 진술이 되기 위해서 지켜져야만 하는 이치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논리가 요구하는 이치는 이런 많은 이치들 중의 한가지이다.
그러나 어쨌든 만일 내가 ‘플라톤은 총각이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나는 ‘플라톤은 남자다’는 말에 대해서도 동의해야 한다. 또 ‘칼 루이스가 빨리 달리고 있다’고 인정한 사람은 ‘칼 루이스가 달리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 ‘지구는 둥글다’고 믿는 사람은 ‘지구는 네모지다’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논리가 요구하는 <말의 이치>이다. 너무 뻔한 얘기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논리란 아무리 높은 수준의 논리학에서도 이러한 시시한 얘기에서 드러나는 뻔한 이치를 다룬다. 이것이 바로 논리적 사고의 요점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뻔한 이치를 잘 지킨다고 해서 올바르게 말하고 사고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플라톤의 키가 2미터보다 크다면 플라톤의 키는 199 센티미터보다 크다; 만일 플라톤의 키가 199 센티미터보다 크다면 플라톤의 키는 198.5 센티미터보다 크다” 등등. 늘 이런 계산만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논리적 이치에 맞는 사고를 하면서도 평생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셈이고, 따라서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신병 환자일 것이다.
논리적 이치를 다 지킨다고 해서 곧바로 올바른 말, 제대로 된 사고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플라톤의 키가 180 센티미터보다 크다>와 <플라톤의 키가 160 센티미터보다 작다>를 동시에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올바른 사고일 수가 없다. 논리적 이치를 어기고서는 결코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논리가 요구하는 이치는 올바른 사고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리는 흔히 ‘논리적 사고’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심오하고 통찰력 있는 사상적 업적을 이룩했던 위대한 사상가나 과학자를 떠올리거나, 실낱같은 단서를 포착해서 범인을 찾아내는 셔얼록 호움즈 같은 명탐정을 연상한다. 그런 재주로 말하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논리적 사고라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매우 어려운 것이리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논리적 사고란 보통 사람에 비해서 뛰어난 사고력이나 지능을 가진 사람들, 또는 많은 공부를 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논리적 사고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실제로 누구나 늘 논리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30분이 걸리는데 1교시 시작 20분전에 집에서 출발하는 경우에 우리들 대부분은 불안과 초조감에 휩싸인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도 <학교에 지각하게 되리라>고 이미 추리해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추리는 우리가 전혀 하고 싶어하지 않는데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친구들도 가끔 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이 다른 점은 그 정도의 추리를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 꾸지람 듣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정도의 용기(?)를 가졌다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능력’이라는 표현은 과장도 아니고 공치사도 아니다.
실제로 최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루하고 복잡한 계산을 그렇게 쉽게 해내는 컴퓨터가 사람들이 쉽게 처리해내는 일상적인 일들에 있어서 얼마나 바보인가 절실히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매우 논리적인 동물인 것이다.
논리가 말의 이치를 다루기는 하지만 모든 말의 모든 이치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한다. 다양한 상황과 목적들의 차이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아채기 때문에 보통은 의식하지도 않는다. 몇 주만에 만난 그다지 친하지 않는 친구가 “그동안 잘 지냈니?”하고 묻는데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미주알 고주알 풀어놓는 사람이라면 사람 상대하는 직업은 포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연극배우에게 맑은 날씨에 거짓말한다고 비난하지도 않으며 “통곡하는 바위”를 노래하는 시인에게 엉터리라고 말의 이치를 들이대지도 않는다.
논리적인 원칙이 요구되는 상황이란 언제나 진리주장(truth-claim)이 제시되는 상황이다.
누가 무엇이 어떻다고 주장할 때에 비로소 논리적인 이치를 따질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논리가 적용될 여지는 많지 않다. 아인쉬타인이 <태양 근처에서 빛이 휠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바빠진 것은 천문학자요 물리학자들이었지 논리학자들이 아니었다. 논리적인 원칙이 적용되려면 진리주장이 있되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 내지 근거들도 함께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논증 = 주장 + 근거들
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예를 들어서 낡은 모자를 발견한 셔얼록 호움즈와 왓슨 박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한 낡은 모자를 잠시 들여다보던 셔얼록 호움즈는 왓슨에게 <이 모자의 주인은 매우 지적(intellectual)인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왓슨에게 호움즈가 붙인 이유는 <머리가 크면 그만큼 든 것도 많은 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장면쯤 되면 논리적인 이치를 따질만한 재료가 제공되어 있다. 호움즈는 왓슨에게 어떤 진리주장(=이 모자의 주인은 매우 지적인 사람이다)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머리가 크면 든 것도 많다)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주장이 근거들과 함께 제시될 때 우리는 그것을 논증(argument)이라고 부른다. 논리란 좋은 논증이 갖추어야 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요. 논리학이란 바로 이러한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논리가 말하는 이치를 따지려면 반드시 논증적인 말이나 글, 즉 이유 내지 근거를 들어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말이나 글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논증적인 글이란 진리주장과 근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글이다. 어떤 글이 내세우는 진리 주장을 <논지>, <결론>, <주장> 등의 말로 부르기도 하며 근거를 <논거>, <전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논증적인 글이 주어지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글의 주장, 즉 결론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거야 국어시간에 많이 해 본 일 아닌가? 두괄식이니 미괄식이니 또 무슨 괄식이니 하는 게 바로 이런 얘기였다. 글 자체가 난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문제는 쉽다. 이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태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하여 완벽하게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부터 읽는 모든 글을 연습문제로 삼을 수 있다. 글들을 문단마다 나누어서 생각하라. 그리고 각 문단에 대해서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하고 물어보라..
일반적으로 ‘왜냐하면’, ‘···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유인 즉슨’, ‘···과 같은 점을 생각하건대’, ‘첫째···, 둘째···’, ‘예컨대’ 등의 말들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붙는다. 논증적인 글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그러므로’, ‘고로’, ‘따라서’, ‘요컨대’, ‘간단히 말해서’, ‘결과적으로’, ‘내 생각으로는’, ‘사실’, 등등의 말로 시작하거나 ‘···로부터 다음을 알 수 있다’, ‘···는 ― 를 보여준다’, ‘···는 점은 명백하다’ 등의 구절로 장식되어 있다. 이런 표현들에 주의하면 주장을 분별해내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의 일부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이런 말들이 주어진 글의 최종적 결론을 언제나 잘 가려내 주는 것도 아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글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글은 어떤 문제(issue)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독서의 여러 종류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이라면 “독서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며 이러한 글이 경우에 따라서 택해야 할 독서방법을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있다면 이 글은 “어떤 방법으로 독서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신문의 기사문이나 전자제품의 매뉴얼조차도 어떤 문제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설명문이나 묘사문, 또는 기록문 등에 대해서는 문제는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주장을 찾을 수는요약되어 없다.
주장을 담고 있는 글이라면 그것은 이미 논증적인 글이 될 것이다.
논증적인 글의 경우에 주장이란 그 논증이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니 논증적인 글을 대할 때 글의 문제와 주장을 함께 찾아보려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 글의 문제는 제목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고 글의 서두에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은 문제를 명확하게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으므로 글의 시작 부분을 중심으로 삼아서 독자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때에 따라서 논증이랍시고 제시된 글의 주장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그 글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다. 문제와 주장이 불분명한 글은 물론 좋은 글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글의 경우에도 아무런 문제도 다루고 있지 않다기보다는 여러 개의 문제와 주장들이 섞여 있기가 십상이다.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애매한 글의 문제와 주장들도 정리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쯤 되면 치밀하게 읽는 훈련을 꽤 거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문제와 주장이 선명한 글들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하자면 논리적 사고란 화자 내지 필자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문제와 주장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한 말이나 글의 경우에는 문제와 주장을 가려내는 일조차도 매우 어려울 수 있다.
요컨대 독서력 내지 독해력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글을 대할 때는 늘 문제와 주장을 잡아내려는 태도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글을 읽자.
질문1: 이 글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2: 이 글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우에 따라서 글의 문제와 주장은 글 안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밑줄 긋는 것으로 문제파악, 주장파악이 해결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글을 읽고 자신의 문장으로 요약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글의 문제는 물론 의문문으로 표현될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글의 요점을 정리해내는 훈련이야말로 논리적 사고를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 그러면 몇 가지 예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다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크리톤이라는 친구가 한 말이다. 이 글에서 크리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크리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
크리톤: ···그러나 이보게 소크라테스, 자네가 내 충고를 듣고 탈출하기에 아직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닐세. 자네의 죽음은 나에게는 이중의 재난이 될 걸세. 자네가 죽는다면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낼 수 없을 친구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자네와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자네를 위해서 돈을 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자넬 틀림없이 구할 수 있었을 테니 내가 자넬 죽인 셈이라고 생각할게 틀림없지 않은가?
친구보다 돈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평판을 듣기보다 더 경멸 당할 일이 어디에 있겠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자넬 설득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이곳을 떠나기를 거절한 것은 바로 자네 자신이었다는 것을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네.
이 글에서 크리톤이 문제삼는 것은 무엇이며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탈출할 것을 매우 간절하게 권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의 문제는 <소크라테스는 탈옥해야 하는가?>하는 것이요, 이 글에서 크리톤의 주장은 <소크라테스는 탈옥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논증적인 글에서 주장이란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해 두자.
민찬홍 (한남대 교수)
정보출처: 동원고등학교 국어과 (창의력 신장을 위한 수준별 논술 읽기 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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