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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상식 철학, 哲學, philosophy_02 5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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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哲學, philosophy_02 5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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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제목: 철학, 哲學, philosophy_02 5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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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4. 철학에서의 진보
5. 제 부문
6. 철학적 사고
7. 철학의 가치( The Value of Philosophy*/Bertrand Russell)
8. 철학과 세상
4. 철학에서의 진보
일반적으로 과학에는 진보가 있어도 철학에는 진보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철학에는 다른 학문의 경우와 같은 의미에서의 진보가 없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른 학문의 경우에는 일정한 대상이 정해졌고 따라서 하나의 학문은 언제나 같은 대상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를 계속함에 따라 점차 그 대상에 관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지금까지의 지식이 그릇된 것임을 알게 되면 그 잘못을 고쳐 올바른 지식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학문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아 점차 진보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반해 철학의 경우는 일정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다른 학문의 경우와 같은 진보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철학은 스스로 선택한 대상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사색하고 연구를 계속한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철학은 전혀 다른 사항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연구의 대상이 달라지게 되면 그 때까지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철학은 완전히 새로운 지반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이와 같이 그 이전의 철학을 끊임없이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철학에는 모든 의미에서 진보?발전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철학은 오히려 그 이전의 철학의 지반 자체를 반성하고 그 지반을 무너뜨려 새로운 지반 위에 새로운 입장의 철학을 구축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지반이 끊임없이 새로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 철학의 진보가 있는 것이다.
철학사상(史上) 철학의 대상이 여러 가지로 변화해 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거니와 그 변화가 제멋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의 철학이 딛고 섰던 지반을 반성함으로써 지금까지 연구해 온 철학의 대상이 실은 최선(最善)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 자각에 의해 새로운 대상이 철학의 대상으로 선택되어 왔다. 따라서 철학의 대상이 변화해 왔다는 바로 그 점에 어떤 의미에서의 철학의 진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사상 위대한 철학은 모두가 새로운 지반을 발견하고 새로운 입장에서 철학의 문제를 탐구하였다. 언제나 근원적인 문제에 관해 회의를 느끼고 과거의 철학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데 철학의 본질이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다른 학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의 연구는 철학사(哲學史)의 연구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철학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그 문제가 지금까지의 철학에 대한 어떤 반성에서 생긴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5. 제 부문
철학이라는 학문은 사람에 따라 연구의 대상도 다르고 다루는 문제도 다르기 때문에 철학의 조직도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철학이 어떤 부문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일정한 견해가 없다. 철학 이외의 다른 학문에서는 그 학문이 어떤 부문으로 나뉘는지에 관해서 대개는 일치된 견해가 있다. 이 점에서도 철학의 특수한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철학이 다루는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 우리는 철학의 제부문을 일단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제1의 부문은 사고의 규칙이나 인식에 관해 탐구하는 것으로 논리학이나 인식론이 이에 포함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헤겔처럼 인식론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는 철학자도 있으나,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한다 해도 우선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제1부문은 철학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제2부문은 존재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으로, 그것은 개개의 존재자에 관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에 관해서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고찰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현대에 와서는 부정되는 경우가 많으나, 이런 종류의 시도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밖에 역사라든가 인간이라든가 사회 등에 관해서 그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탐구하는 역사철학 ?철학적 인간학 ?사회철학 등도 있다. 또한 제3의 부문으로 가치에 관해 탐구하는 부문이 있는데, 윤리학 ?미학(美學) ?종교철학 ?법철학 등이 이에 포함된다. 가치에 관한 연구 따위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부정하는 철학자도 있으나,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인생관과 세계관이 필요한 것인 이상이 철학의 부문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6. 철학적 사고
철학적 사고는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알고자 하는 사고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물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절대적 진리는 있는가 등의 근원적인 물음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들은 또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앎의 추구와 연결된다. 또한 철학적 사고는 자유로운 사고이다. 즉, 어떤 형식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비판적?개방적 사고이다. 철학적 사고는 어떤 사실이나 견해를 맹신하고, 그 밖의 다른 생각이나 가능성을 배제하는 교조적 사고 방식과는 구별된다. 철학적 사고는 실천을 위한 사고이다. 따라서 실제로 행해질 수 없는 공상들과는 다르다.
7. 철학의 가치( The Value of Philosophy*/Bertrand Russell)
철학의 여러 문제에 대한 간단하고 매우 불완전한 개관도 이제 끝에 이르렀으므로 결론적으로 철학의 가치가 무엇인고 왜 철학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좋으리라. 과학이나 실제적인 여러문제의 영향으로 철학은 무해무익한 사소한 구분을 하고 지식이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은 더욱 필요하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한편으로는 삶에 목적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철학이 획득하려고 하는 재화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긴 것 같다. 자연고학은 발명을 매개로 함으로써 자연과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하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연구는 오직 또는 일차적으로 연구자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권장된다. 이러한 유용성은 철학에는 없다. 철학 연구가 철학 전공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나나날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가치는,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영향에서 일차적으로 추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만일 철학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노력에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선 실제적인 사람이라고 잘못 알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편견으로부터 우리들의 정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말은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적인]사람은 오직 물질적 요구만을 인정하는 사람, 다른 인간에게는 신체를 위해 음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정신을 위한 양식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잊은 사람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잘 살고 가난과 질병이 최소한으로 감소되더라도 가치 있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세계에서도 마음의 재화는 적어도 신체의 재화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철학의 가치는 오직 마음의 재화에서만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화에 무관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철학 연구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설득할 수 있다.
철학은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지식을 목적으로 한다. 철학이 목적으로 하는 지식은 여러 과학에 통일성과 체계를 주는 지식이고 우리들의 확신과 편견과 신념의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생기는 지식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일 수학자, 광물학자, 역사학자, 그 밖의 학자에게 그들의 학문에 의해 얼마나 명확한 진리가 확인되었는가를 묻는다면 그들의 대답은 당신이 귀기울이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가 솔직한 사람이라면 그는 철학은 다른 학문처럼 적극적인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적극적인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곧 어떤 주제에 대해 분명한 대답이 가능해지면 이 주제는 철학으로 불리지 않고 개별과학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천문학에 속하는 천체에 대한 모든 연구는 전에는 철학에 포함되어 있었다. 뉴턴의 위대한 저술의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였다. 마찬가지로 철학의 한 분분과였던 인간의 마음의 연구는 이제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심리학이라는 과학이 되었다.
따라서 철학의 불확실성은 대체로 사실이라기보다는 외관상의 문제이다. 곧 이미 분명한 대답이 가능한 문제들은 과학으로 넘어가고 현재로서는 분명한 대답이 불가능한 것만이 남아 철학이라고 불리는 전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의 불확실성에 대한 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이 지성의 힘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되지 않는 이상, 인간의 지성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고 이러한 문제들 속에는 우리들의 정신 생활과 가장 관계가 깊은 것도 있다. 우주는 통일된 어떤 계획이나 목적을 갖고 있는가,도는 원자의 우연한 집합인가 의식은 지혜의 무한한 성장을 기대하게 하는 우주의 항구적 부분인가, 도는 결국은 생활이 불가능해질 작은 혹성 의에서 일시적으로 생기는 우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가 선과 악은 우주에 대해 중요한 것인가. 또는 인간에게만 중요한 것인가 철학은 이러한 문제를 풀려고 했고 많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이 다른 방식으로 발견되든 않든 간에 철학에 의해 제시된 대답은 어느 것이나 참이라는 것이 논증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대답을 발견할 희망이 아무이 적더라도 이러한 문제를 계속 고찰하고, 이러한 문제의 중요성을 의식하게 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모든 접근을 검토하고,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지식에만 국한함으로써 자칫하면 말살되기 쉬운 우주에 대한 사변적 관심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것은 철학의 과제의 한 분야이다.
철학이 이러한 근본적 문제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그것이 진리임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종교적 신앙에 있어서 거장 중요한 것을 엄밀한 논증에 의해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판단하려면 인간의 지식을 개관하고 그 방법과 한계에 대해 어떤 견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독단적 발언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앞의 각 장에서 고찰한 것이 우리를 빗나가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철학적 증명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일련의 분명한 대답을 철학의 가치의 일부로 포함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되풀이해서 말한다면 철학의 가치는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획득하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의 체계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철학의 가치는 사실상 주로 그 불확실성에서 찾아야 한다. 철학적 소질이 없는 사름은 일평생 상식에서 생겼거나, 연령 또는 국적에 의한 습관적 신념에서 생겼거나, 신중한 이성의 협력 또는 동의가 없이 마음속에서 자라난 확신에서 생긴 편경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세계는 명확하고 유한하고 분명하다. 보통의 대상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확실치 못한 가능성은 경멸하며 거부한다. 반대로 우리는 철학적 사색을 시작하자마자, 처음의 몇 장에서 본 바와 같이 아주 일상적인 사물조차도 매우 불완전한 대답밖에 할 수 없는 문제로 되는 것이다.
철학은 스스로 제기한 의심에 대해 확실성을 갖고 무엇이 참된 대답인가를 말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들의 사고를 확대하고 관습의 전제로부터 해방시키는 많은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사물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우리들의 확실성의 느낌을 감소시키면서, 철학은 사물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우리들의 지식을 크게 증대시킨다. 철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회의의 영역에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들의 약간 거만한 독단론을 제거하고 친숙한 사물을 친숙하지 못한 측면에서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경이감을 생생하게 유지한다.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유용성은 제쳐 놓더라도 철학은 사색하는 대상의 위대함, 이러한 사색에 의해 흭득하는, 협소하고 개인적인 목표로부터의 자유 때문에 그 가치 아마도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본능적인 사람의 생활은 개인적인 이해 관계의 범위에 국한된다. 가족이나 친구는 포함되겠지만 외부 세계는 그것이 본능적 욕구를 조장하거나 방해하지 않는한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활은 열광적이고 국한된 것이지만 이에 비교하면 철학적 생활은 평정하고 자유롭다. 본능적인 관심의 세계는 적은 세계이고 조만간에 우리들의 개인적 세계를 파멸시킬 거대하고 강력한 세계의 힌가운데에 놓여 있다. 외부 세계 전체를 포함하도록 우리들의 관심을 확대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이 탈출을 막고 있어서 결국은 항복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포위당한 요새 경비대와 같은 상태에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생활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생활이 위대하고 자유로와야 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는 이러한 감옥과 투쟁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탈출의 한 방법은 철학적 사색에 있다. 철학적 사색은 우주를 두 적대 진영동지와 적, 우호적인 것과 적대적인 것, 선과 악 으로 가르지 않고 우주 전체를 공평하게 본다.
철학적 사색은 순수할 때는 인간 이외의 나머지 우주가 인간과 동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식을 확득하면 동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식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자기]가 확대되지만 이러한 확대는 직접 추구되지 않을 때 가장 잘 달성된다. 자기의 확대는 지식에 대한 욕구만이 움직이고 있을 때, 앞질러서 대상이 이러이러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바라지 않고 대상 속에서 발견되는 성격에 [자기]를 적응시키는 연구에 의해 달성된다. 이러한 [자기]의 확대는 [자기]를 그대로 놓아 두고 세계는 [자기]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이질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할 때는 달성되지 않는다. 이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요구는 자기 주장의 한 형식이고 모든 자기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기 주장도 [자기]의 성장[자기]는 이것을 욕구하고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에 대한 장애물이다.
세계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
따라서 자기 주장은 세계를 [자기]보다 가치가 적다고 하고 따라서 [자기]는 자신의 재화릐 위대함에 한계를 두게 된다.반대로 사색에서는 우리는 [비아,not-self]로부터 출발하고 위대함을 통해[자기]의 경계를 확대한다. 우주의 무한성을 통해 이를 사색하는 정신은 어느 정도 무한에 관여한다. 이러한 이유로 보아 우주를 인간에 동화시키려는 철학은 영혼의 위대함을 육성하지 못한다. 지식은 [자기]와 [비아]를 통일하는 형식이다. 모든 통일과 마찬가지로 [자기]와 [비아]으 통일은 한족이 지배하면 손상되며 따라서 우주를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것에 억지로 일치시키려고 하면 손상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진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공강과 시간과 보편의 세계는 정신의 성질이고 정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알 수 없고 무의미하다고 하는 견해를 보이는 철학적 경향이 널리 퍼지고 있다. 만일 지금가지 우리들의 검토가 옳다면 이러한 견해는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러한 견해는 철학적 사색으로부터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박탈하는 결과를 처래한다. 이러한 견해는 사색을 [자기]속박에 두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서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아]와의 통일이 아니라 우리들과 우리들을 넘어선세계 사이에 투시할 수 없는 베일을 치는 일련의 편견, 습관 및 욕망이다. 이러한 인식론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람은 그의 말이 법이 아닌 것을 두려워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과 같다. 반대로 참된 철학적 사색은 [비아]의 모든 확대에서, 사색되는 대상을 위대하게 하고 따라서 사색하는 주체를 위대하게 하는 모든 것에서 만족을 느낀다. 사색에서는 개인적 또는 사적인 모든 것, 습관이나 사리사욕이나 욕망에 의존하는 모든 것은 대상을 왜곡하고 따라서 지성이 추구하는 통일을 손상시킨다.
이와 같이 객체 사이의 장벽을 둠으로써 이러한 개인적 및 사적인 것은 지성에 대해 감옥이 된다. 자유로운 지성은 신이 사물을 보듯이 [여기]와 [지금]이 없이, 희망도 공포도 없이 습관적 신념이나 전통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푱정하고 냉철하게 오직 지식인간에게 가능한 한 개인적이고 순수하게 사색적인 지식을 추구하면서 사물을 볼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지성은 감관에 의해 알려지는 지식보다는 개인적 역사의 우연이 섞이지 않은 추상적이고 부편적인 지식을 더 높이 평가할 것이다. 그런데 감관에 의해 알려지는 지식은, 이러한 관점과 그 감각기관이 나타나는 모든 것을 왜곡하는 신체에 의존하는 것이다.
철학적 사색의 자유와 공평성에 익숙한 전신은 행위와 감정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자유와 공평성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그 목적과 욕구를 그 밖의 모든 것이 어떠한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도 영향받지 않는 세계의 극미한 단편이라고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사색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순수한 욕구가 되는 공평성은 행위에 있어서는 정의가 되고 감정에 있어서는 보편적인 사랑, 곧 이용할 만하다거나 찬양할 만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되는 것과 동일한 정신의 성질이다. 따라서 사색은사고의 대상을 확대시킬 뿐 아니라 행위와 감정의 대상도 확대시킨다. 사색은 우리를 다른 모든 도시와 싸우고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한 도시의 시민일 뿐 아니라 우주의 시민이 되게 한다.인간의 참된 자유도, 또한 협소한 희망과 공포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도 이와 같이 우주의 시민이 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의 가치에 대한 논의를 요약하기로 하자. 철학은 그 문제에 대한 확정적 대답을 위해 연구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확정적 대답은 참이라는 것을 알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철학은 문제 그 자체를 위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분제는 가능한 것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확대하고 우리들의 지적 상상력을 풍요하게 하고 사변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독단적 확신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학이 사색하는 우주의 위대함으로 말미암아 정신도 위대해지고 우주와의 합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일은 정신의 최고선이다.
러셀의 글을 읽으며 역시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글은 갖가지 미사여구로 철학이 갖는 위대성과 그것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라면 철학을 공부하는 이는 꽤나 멋있고 완벽한 이가 되어야 한다. (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하지만 현실은 그렇치 못하다. 철학자 자신, 혹은 철학하는 이들끼리는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러셀은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 다른 학문의 문제로 모두 그 자리를 옮겼다 했다. 맞는 이야기이다. 철학이란 학문은 모든 학문의 시초이다. 그렇다면 다른 학문은 철학이라 할 수 없는 것인가 오히려 다른 학문들은 모두 그 명칭 뒤에 철학이란 단어가 생략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요. 지금 우리가 하는 철학은 ' 명칭될 수 없는, 해결이 안된 '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일 뿐이라 봐야할 것이다.러셀은 ' 철학의 가치는 철학이 지극히 확실치 못한 점에 있으며, 철학의 '물'을 못 먹어본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편견에 사로 잡혀 한평생을 보내며,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 라고 성공한 철학자가 갖는 거만의 극치를 보여준다. 과연 그러한가 그 말대로라면 철학자 외에 그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그나마 이 정도로 발전시켰는지 모르겠다.
철학의 물을 먹지않은 수많은 이들도 자신의 편견을 넘어섰고 그 자신 갖는 세상의 한계를 넘고자 했다. 또한 그 분야의 학문이 갖는 불확실성은 굳이 귀납법 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무수한 학문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것은 철학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다. ' 답답한 개인의 목적을 떠나버리게 된다는 철학의 주요한 가치' 라 러셀은 말하지만 무릇 학문 중 그 궁극적인 목적이 답답한 개인의 목적인 것이 있던가또한 ' 의식적으로 넓히고자 노력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아는 가장 넓어진다. 미리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대상을 연구하여선 안 된다. '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철학의 이율배반이다.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이들이 오히려 풀리지 않는 지점에서 의식치 않았던 철학의 세계와 맞닥뜨린다. 그리고 철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자 한다. 하지만 철학을 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이 풀리지 않을 학문의 세계에 몰두한다. 철학을 통해서 우리는 ' 참된 자유를 누리고 답답한 희망과 공포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이 무슨 허황된 말이란 말인가. 철학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가. 종교에 귀의하는 것과 다를게 무언가. 글 제목의 ' 철학하는 보람 '은 럿셀의 ' 철학하는 보람 ' 일 뿐이다.
철학이란 학문은 고대 희랍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그때 이미 사라져 버려야 했다. 그 이후로 철학자들 중 철학 한 학문만 공부한 자 있던가 거의가 다른 학문을 하다가 철학이라는 학문에도 손을 댄 ' 소수의 ' 천재들이였다. 그리고 ' 대다수의 ' 평범한 이들이 천재들이 느꼈을 그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지적쾌락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 그들의 사상을 섭렵한다. 철학을 비하시키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철학도 다른 학문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 러셀의 말대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철학' 이란 이름으로 남았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학문들도 모두 해결된 것들이 아니다. 다 '철학' 처럼 미지의 영역. 해결되지 않는 과제들. 해결되어 가는 과정의 지루한 반복이 그 학문만의 체계에서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 학문들에서도 얼마든지 지적 오르가즘은 가능하다. 검증될 수 없는 지적쾌감만으로 철학의 보람을 찾는 것은 어째 좀 빈약하다. 다른 학문들에 대하여 어떤 우위를 점한다고 보는 그의 근거.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어디까지나 그의 글만 바탕으로 해서 시비를 걸어보았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구분이 정확치 않은 문제점도 있다. 그냥 통틀어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철학을 지칭한 것인지 글에 섞인 주관적 감정과 부족한 구체적 실례는 글쓴이의 문제점도 있겠지만 러셀의 글과 비슷한 성격으로 쓰고자 한 의도도 있었다는 변명으로 비난을 회피하고자 한다.
8. 철학과 세상
개인적으로 철학의 궁극적 목적을 인간과 사회의 행복을 구현하는 것, 혹은 그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사회와 문화, 그리고 개인의 삶과 질서에 어떤 準據를 '권유'하거나 '개혁'하거나 '요청'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사실상의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그 가치의 정립이야말로 철학이 실현해야할 귀중한 본연의 '業'의 하나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불미스럽고 우려할만한 붕괴현상 - 일찍이 니이체와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예견된 -은 이미 근대의 철학자들과 과학선도자들에 의해 확립된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봉'의 결과이거나 또는 그로부터 파생된 부산물인 것 같습니다. 현대의 물질문명의 눈부신 진보와 번영, 풍족한 만찬은 합리적 이성을 숭배했던 서구문명의 완벽한 승리처럼 보여지지만, 그 배후에 양산되는 무수한 부조리와 모순과 파멸의 서곡은 그들의 사상이 오히려 탄핵을 받아 마땅할 만큼 불건전한 초석이었다는 것이 증거되고 있는 셈입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지난 몇 세기에 걸친 팽창의 결과 인간은, 혹은 인간성은 더욱 배제되고 무시되었으며, 그 중심으로부터 멀리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산업자본주의는 유일하고 확고한 헤게모니(hegemony)를 휘두르며 인간과 사회의 전체행위, 즉 경제, 정치, 교육, 문화, 욕망, 思考, 행복, 희망 등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정당한 이념으로 제도화되었던 과도한 개인주의와 자본에 대한 신경집착적 욕망은 계층적, 지역적 빈부격차의 오욕을 낳고 있으며, 또한 인간불신과 긴장과 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적응과 낙오, 또는 그를 포용하지 못해 야기되는 사회 병리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황폐해졌으며, 병들었고, 처절한 불안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 그리고 적대적 경쟁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의 대결 구도 속에서 우리는 더욱 잔인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잔혹한 채찍을 휘둘러 서로의 내면과 영혼에 핏자국을 내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평범한 성장을 보이던 청소년이 도심 속 어느 공간에서 아무나, 누구라도 죽이고 싶다며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는 이유로 사람을 해친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부모를 토막내 살해하고 그것이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노라 고백하는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또 자신의 제자를 살해하고 유기했던 교사가 있었는가 하면 돈벌이를 위해 자기 자녀를 이용하는 아비가 있고, 이제 겨우 여중생인 아이들이 스스로 윤락의 수렁텅이로 뛰어드는 일도 흔한 현상이 되었으며, 그들을 돈으로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어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힘없는 계층을 학대하고 이용하거나 갈취하는 장면뿐 아니라 어린 여학생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노라 침묵하는 장면이 TV에 가득합니다.
일부 인격이 무너진 사람들의 행태(行態)라고 침묵하기엔 이러한 사회괴사현상이 사회전체에 병처럼 깊어지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시도는 오히려 비웃음과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안다는 사람과 한다는 사람들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을 방관하거나 방임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공자의 시대에도 당시의 사회풍속이 문란해지고 정상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며 경종을 울리며 탄식한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시대의 철학자와 현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건전한 현상을 꾸짖고, 세속의 풍속과 가치, 윤리에 간여하여 보다 나은 풍속과 가치와 윤리와 의미를 회복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체득한 바에 의해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권고하며, 그를 통해 사람이, 사람의 세상에서, 사람의 이름으로 진정한 지혜와 바른 덕목으로 이끌게 하는 일, 그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주어진, 외면할 수 없는 의무라 믿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오늘의 시대적 세태와 문화적 흐름을 다만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맡긴다 해도 시대는 흐르고 사회관계는 지금과 다름없이 무한의 관계를 창출할 것입니다. 사회규약과 원리, 질서가 위협받거나 당장의 집단표상이 파괴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시대 자신의 자체 동력을 통해 스스로 부족함을 메우고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통해 새로운 줄기와 흐름을 형성, 발전한다는 것으로 충분히 입증될 수 있는 것입니다. 허나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오류와 잘못을 수정하는 대가(代價)는 분명 피지배계층과 사회소외계층에게 전가될 것이며, 그것은 산업자본주의의 뚜렷한 속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실존주의를 극복해야 했을 때부터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시민의 삶을 버리고 전문화된 영역으로 떠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색과 탐구보다는 사물의 속성과 현상 배후에 존재하는 논리와 구조의 실타래를 파헤쳐 이를 독특한 해석방식으로 해독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대의 철학자들에게는 더 이상 '자유의지'와 '정언적 명령', '운명애', '희생'과 '중용' 그리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 등은 무의미한 개념이거나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인간적 윤리와 인격, 그리고 가치에 간섭하려 하지 않으며, 개인적 삶에 관심을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실천적 철학을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떼어놓고 심리학과 유기생태학의 영역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인간 정신의 최후의 보루인 종교마저도 더 이상 사회, 문화적 병리현상에 참여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참여에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발언권은 약화되었으며 그들의 행위 뒤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존의 질서가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서로가 적대하는 가운데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단체는 오로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으며, 자기에게 소속된 신자들만이 '구원'될 수 있노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개방되어가고 있지만, 사회에 대한 종교적 시각은 오히려 단절과 은둔의 城으로 퇴각하고 있습니다. 예술에서는 그 길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음악은 일부계층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절의 길을 재촉하고 있으며, 회화 역시 특정한 부류만을 위한 사치와 과시의 호사로운 가격을 즐기고 있습니다. 더욱이 문학은 정신병리적 현상을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예리하고 현란한 테마와 언어의 기교적 눈부심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이제 사명감이나 운명적 예감에 휩싸여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발행부수와 인세에 의해 좌우되는 文人들만이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대중문화는 더욱 자극적이며 통속화된 '쾌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흐름은 이미 제어하지 못할 속도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물들이고, 우리의 혈관을 타고 심장 가까운 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쾌감과 자극에 익숙한 세대는 이제 더 이상 지루하고 무거운 명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며, 가볍고 탄력적이며 빠른 것만을 최상의 기쁨으로 인식,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러한 쾌속 질주는 우리의 세태를 형성했으며, 어떤 방지장치도 없이 단지 어떤 중독성을 통하여 거부할 수 없는 쾌감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그 어느 반향(反響)도 사회 전체에 막대한 지배적 영향을 행사하지 못할 만큼 다양한 가치와 극단의 소규모 단절된 문화가 홍수를 이룰 것으로 보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 부다, 마호멧, 맑스와 같이 막대한 권위와 지도력을 가지고 개혁을 주도하지 못할 것이며, 정신사에 깊은 영향을 행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라는 막강하고 유일한 이념과 그 이해관계에 의해 모든 것이 선택될 것이고, 조절될 것이며 개편될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보다 풍족해질 것입니다. 사회는 보다 화려해질 것이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더욱 가열된 발전의 熱線을 달릴 것이며, 산업은 더욱 융성할 것입니다. 삶은 보다 시끄러워진 세상에서 보다 오래 살아야 하고, 급속한 변화와 단명하는 유행주기를 지켜보며, TV에 등장하는 젊은 인기인과 그들의 사생활에 흥미를 보여야할 것입니다.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에 우리를 맡긴다면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자리에서 편안한 수면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기엔 화려한 문명과 다양한 세태의 조명 뒤로 비통하고 절망적인 신음이 어둠 속에서 움크리고 있습니다. 그 신음은 이제 인간의 삶은 희망이 없다는, 모든 것은 결국 인간과 세상에 대한 체념이 되고 말 것이라는, 그렇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탄식으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러한 불길한 탄식과 예언을 남의 일이라 여기고, 철학이라는 학문을 방패 삼아 지적 유희와 언어의 고급화, 해석의 즐거움 속으로 침몰하여 나 하나의 평온한 삶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겁한 일인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비록 생각일 뿐이고 하나의 이상과 염원으로 간직하고 있을망정 우리와 우리 후대의 세상이 신뢰와 동화를 통하여 인간다운, 보다 아름다운 가치를 이루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즉 인간과 사회의 행복을 구현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될 수 있도록, 적어도 그 일에 앞장서서 노력할 수 있는 사명을 지금 이 시대의 철학에게 요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자각해주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어느 한 학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라고 포기할 수 있는 무엇이 있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나마 이 시대,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오래된 믿음이 있습니다. 삶 자체로부터 울려오는 마땅한 '울림'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빈둥거려왔던 철학의 진정한 '業'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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