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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시험 논술시험 읽기 자료: 깎고야 만 내 아들의 묶은 머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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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1집에 실린 글 ‘나의 묶은 머리털’을 쓴 전해원의 어머니.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고 있고, “또 하나의 문화” 편집동인. 저서로 ꡔ탈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 읽기가 있으며, 요즘은 학업 중단 청소년을 연구하고 있다.)
전학 수속을 하면서 서울에 돌아온 것을 실감한다. 많은 서류와 일주일 동안의 기다림.
“지난 번 다니던 학교로 해 주세요. 집 앞에 있으니까요.”
“협의를 해 봐야 합니다.”
무슨 협의를 해야 할까? 관료제의 가장 큰 기능은 개인들로 하여금 수시로 무력감을 경험케 함으로써 공권력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는 걸 거다.
해원이 머리 때문에 방학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해 보면 머리를 길러 묶는 것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운 머리 스타일도 없을 것이다. 내 단발머리가 자라듯이 해원이 머리도 꽤나 빨리 자라서 우리는 닮은꼴처럼 머리를 묶고 다녔다. 머리가 제법 자리를 잡아가는데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고, 공들여 기른 머리를 잘라야 하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송회 자리에서 해원이 머리 문제가 토론거리로 올랐는데, 칠십 년대 서울 명동 거리에서 머리칼을 잘린 경험이 있는 한 엔지니어는 자신이 그런 “야만적인” 두발 단속에 전혀 대항할 생각도 없이 도망만 다닌 과거를 기억해내고는 분해했다. 교환 교수로 와 있던 한 법대 교수는 강제로 교사가 머리칼을 자를 경우, 신체 침해권 조항으로 충분히 법적 사건화할 수 있지만, 자기 같으면 먼저 학급 회의를 통해 두발 자율화를 건의해 보겠다고 했다. 해원이는 “서울의 중학교 사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학급 회의가 거의 열리지 않고요, 어쩌다 열려서 건의를 한다 해도 전체 반장 회의에서 제대로 토의가 되지 않고요. 또 토의가 되어 결정을 했다 해도 학교에서 무시하면 그만이에요”라면서 오히려 그 “순진한”교수를 가르치려 들었다.
아이는 순진하게도 학교에 자신의 논리를 이야기하면 통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당연히 법적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내겠다는 계산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권을 침해하는 것과 불필요하게 남녀를 구분하는 것에 강하게 저항을 해왔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학생 인권”을 찾는 것에 신경을 쏟아 온 해원이에게 이번 일은 참으로 의미 있고 신나는 프로젝트일 수 있었다.
나 자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중학생이 머리를 기르겠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십일 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자기 연출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문화적 창조는 개인의 자기 형성에 기초하고, 자기 형성에 중요한 것은 자기 표현과 자기 연출이다.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신체에 어떻게 자유로움이 깃들 수 있나? 자유의 자유로움은 신체의 자유로움을 기초로 하고, 실제로 신체의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은 근대 정신의 핵심이 아닌가?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신체에 부당하게 가해지는 억압은 최소한 줄여나가는 것이 이십일 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을 기르는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국 사회가 단순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로 남아 있겠다면 할 말은 없다. 회색 제복에 넥타이를 매고 공공칠 가방을 든 하급 세일즈맨들을 양성시켜서 경제 성장을 지속시키겠다면 현재와 같은 입시 위주의 교육과 중세적 통제방식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초국적 자본은 인건비가 싼 곳으로 이동하고 있고, 대기업들은 “유연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해내는 인력을 잡아라”라며 창의적인 인력을 눈을 비비며 찾고 있지 않나? 기업은 질적인 인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대학을 탓하지만, 아무리 능력 있는 대학 교수라 해도 중세적 통제 속에 길들여진 고득점자들을 창의적 인간으로 만들어낼 요술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
여전히 남녀 분반에 암기식 교육을 시키는 학교 문화의 시대착오성은 절망적이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물꼬를 터 가야 하지 않을까? 머리를 기르겠다는 사회적 발언이 현재 교육 제도에 대한 새로운 점검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일으켜 볼 만한 사건일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던 나는 막상 서울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갔을 때 해원이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상상을 하면 슬퍼졌고, 그 투사적 기질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나는 현실로 돌아와 따져 보기 시작했다. 지금이 머리 문제를 제기할 적절한 때일까? “대중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내 결론은 그런 문제를 띄우기에 좋지 않은 때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은 “미국 갔다 와서 까분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매우 감정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처리해 버릴 것이다 내 판단에, 지금 우리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만심을 한껏 부풀리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했던 문화 식민주의는 급격하게 문화 우월주의와 한민족 제국주의적으로 기울고 있고, 대중매체와 국가는 그 면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한국인은 특히 미국에 기죽어 온 과거를 억울해 한다. 그래서 “미국 놈은 미국식으로 하라지. 유서 깊은 우리는 더 나은 우리식이 있어”라면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회 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고 있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거의 모두 팔십년대식 사회 운동에 질리고, 끝없이 터져 나오는 엄청난 위기들에 놀라서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 사적 영역에서 감각적 만족을 느끼며 살고 싶어한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외양으로 “튀는 것”,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애인과 차를 마시고 애인을 보내고는 옛 감정을 되씹어 보는 것, 이런 일들에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떠든다고 사회가 변하나? 논리 없는 시대에 논리를 만들어 시끄럽게 굴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무기력감을 더 강화하는 짓은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정의와 당위를 이야기하는 계몽주의가 버겁고, 다른 이들의 억압을 대변하겠다는 엘리트들도 볼썽사납다.
거나마 여전히 사회 운동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 머리 문제는 황당하게 다가갈 것이다. 중학생이 머리를 기르겠다고 고집한다? 그것도 미국이나 왔다 갔다 했다는 배부른 아이가?
나는 두발의 자율권을 마땅히 따냈어야 할 칠십 년대 장발족의 무기력과 팔십 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온 이들의 봉건성에 화가 났다. 온갖 금지를 통해 사람을 옭아매는 우리나라 제도 교육의 구태의연함도 놀랍지만, 너무나 당연히 자신이 머리를 기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보는 것도 심란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규칙은 지키기 위해서 있기도 하지만 또 고쳐지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닌지, 교보 문고에 너무 자주 데리고 다닌 것은 아닌지, 아이를 너무나 과보호한 것이 아닌지 갖가지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 기르기란 이렇게 힘든 일인가?
나는 해원이에게 이런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네가 절실하게 머리를 기르고 싶다면 문제를 일으켜도 좋다. 그러나 남을 위해 하겠다면 그만둬라. 머리를 기르고 싶은 학생들이 많다면 해도 좋지만 네가 앞장을 서서는 안 될 것이다. 너는 곁에서 참모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할거다. 네가 하려는 식의 운동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런 말이 해원이에게 먹혀들 턱이 없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내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해원이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 다녔다. 요즘 여학생 중에는 소년 같은 아이들이 많아서 해원이는 그런 여학생으로 “통과”되고 있었던 것이다. 개학이 가까워지자 할머니가 “너 이제 미장원 가야 하지 않니?”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으니까 “할머니도 참. 내부에 적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라면서 더욱 단호하게 “투쟁의지”를 굳혀 가고 있었다. 내가 제일 걱정한 것은 해원이가 머리 사건으로 크게 상처를 입고 사회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개학 전전날 나는 꽤 망설이다가 학교로 교장 선생님을 뵈러 갔다. 워낙 더워서 그런지 일년만에 뵙는 교장 선생님께서는 좀 수척해지신 듯했다. 학부모들이 교복을 입히라고 성화를 해도 끄덕 없이 교복 자율화를 고수하고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려고 사방으로 애를 쓰시는 분이다. 나는 해원이가 미국에서 유익하고 즐거운 한해를 보냈으며, 다시 이 학교로 전학을 올 것이라는 것과 그 동안 머리가 길었는데 자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로 운을 떼었다. 교장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일은 부모님이 알아서 못하십니까? 혼자 머리 기르게 해 줄 수는 없지요. 실은 아이가 괴롭습니다. 별다르게 하고 다니면 따돌리고 자신이 괴로워서 못 다닙니다.”
나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요새 아이들이 “튀는 것”을 좋아하고, 또 개중에는 해원이처럼 따돌려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아이가 적지 않음을 말씀드릴까 하다가 가만히 있었다. 아이가 단순히 머리를 기르고 싶어서라기보다 다른 의도가 그 속에 담겨 있으며, 이것을 기화로 규칙을 바꾸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지 예외 조항을 두어 달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안 했다.
“요새는 여자애 머리도 묶지 못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외모에 워낙 신경을 써서 더 엄하게 다루지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이다. 요즘 대다수의 젊은 아이들은 온통 외모 꾸미기와 전화 호출기와 이성 친구 생각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외국에서 온 이들도 이구동성으로 한국 젊은이들이 왜 그리 외모에 집착하느냐고 물어온다. 사회학적 분석을 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장 선생님의 고충을 내가 왜 모르랴? 특히 중학교 삼학년들의 가출은 급격히 늘고 있으며, 가리봉동의 가출촌 소녀들은 손님 접대가 적성에 맞는다면서 찾으러 온 담임 선생님을 오히려 위로하여 돌려보내기도 한다는 세상이니, 이런 면에서 관리 불가능한 상황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요즘 주유소에서 “즐겁게” 일하는 집나온 중학생들을 보아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르는 ‘교실 이데아’를 들어도, 청소년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나는 며칠 전에 딸아이 친구들이 부르던 “디 제이 덕”이 부른 노래가 생각났다. 제목이 ‘성수대교’이던가?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 그 어떤 변명, 핑계, 용납할 수 없다. 무너진 다리에 끊어져 버린 꿈, 무너져 버린 사랑, 무너져 버린 믿음, 어른들의 치졸함에 누명을 쓰고 가버린 친구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아 천구백구십사년 부실 공사 추방 원년 천구백구십사년”
머릿속은 성수대교를 그리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 정도였다.
“집에서 다시 한 번 말을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을 텐데 선생님께서 잘 말씀해 주세요.”
아이들 학교만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몸짓도 공손해진다. 자식이 웬수라던가? 학생 지도는 교장 선생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감과 학생 주임 선생님도 계시니 함께 의논해서 해 보겠다는 말씀을 들으며 교장실을 나왔다. 학교라는 거대한 통제 관리 체제는 너무나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가슴을 짓눌렀다.
방학이라 학교에는 당직 선생님 한 분만 계셨다. 미술을 가르치는 여선생님이신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곁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친근한 감도 들고 답답한 김에 아이 머리 이야기를 꺼냈더니 매우 안타까워했다. 작년에 미국서 오래 살다온 여학생이 있었는데 귀걸이를 하고 와서 겨우 설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모도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학교 규칙에 문제를 제기해 왔지만 나중에는 아이도 잘 적응해 가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 오면 이곳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아이들도 다 하고 싶어해서 안 된다. 대학 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을 했지요. 남자 아이 머리 기르는 것은 아직은 안돼요.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천천히 변하고 있지요. 그냥 미국에 두고 오시지…. 그곳에서 공부를 잘 하고 있었다면 왜 데리고 오셨어요? 그곳에서 자유롭게 지내다 오면 이곳 생활은 힘들 거예요.”
자식이 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세계화를 외치는 이 땅에서, 또 많은 아이들이 중학교 삼학년에 스스로 해외 유학을 떠나는 마당에 매우 지당한 제안이기도 했다. 자유를 원하는 아이. 개성을 존중받고 싶어하는 아이는 이 땅을 떠나라!
실제로 해원이는 그곳에서 일년을 지내면서 무척 행복해 했다. 방학이 없으면 좋겠다는 정도로 엉뚱한 질문을 하는 엉뚱한 질문을 하는 학생이 사랑 받고, 체벌이 없는 학교, 자신이 묻는 모든 질문이 자기만이 하는 질문이 아닌 학교, 양성적인 아이들이 많고, 남자와 여자가 옷 바꿔 입고 오는 날이 있는 학교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해원이는 그런 재미있는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그곳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두 학교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챈 해원이는 궁리 끝에 한국의 아이들과 미국의 아이들을 이년씩만 바꾸어 보면 모든 교육 문제가 해결될 것인데 그것이 현실로는 불가능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미국은 유월에 졸업이라 아이는 그곳에서 졸업식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이는 더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을 두고 슬퍼했다. 멍청하게 소파에 누워 있다가 “나는 왜 한국서 태어났을까?”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하나의 문화” 친구들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간다고 덧붙였다. 그래, 땅과의 인연, 자신을 길러주고 사랑해준 사람들과의 인연을 잘 맺고 좋게 이어 가야지.
해원이는 긴 머리 스타일을 유지하려 하는 이유를 두고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정리한 것 같았고, 머리를 묶으면 “눈썹을 덮으면 안되고 귀를 덮지 말며 어깨에 닿지 않는 단정한 머리”를 요구하는 교칙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에 재판을 걸면 교칙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마침 “샘이 깊은 물”에서 원고 청탁을 하자 글을 쓰면 “투쟁”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하루 꼬박 앉아서 글을 써냈다. 학원 아이들과 의논도 하며 부딪치면 쉽게 될 것 같은지 점점 더 의기양양해 갔다. 어쩌면 그 아이는 완전히 “돈키호테”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학교 가기 전날 아이는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 아버지는 전날에 “샘이 깊은 물”에 보낼 해원이의 글을 읽었으므로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 글에서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느낌을 받아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머리 문제를 계기로 해 자기의 생각을 풀어내고 글로 정리해 본 것은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투쟁을 하는 것에서 존재를 실감한다”는 식의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입시를 눈앞에 둔 중학교 삼학년으로서 일년을 놀다 와서 머리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차분히 따져 보라고 했다.
아이 아버지는 덧붙여 해원이가 중학교 입학 때부터 신경을 써온 체벌이나 교내 폭력, 아니면 학습 방식을 바꾸는 방안들에 문제 제기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투쟁을 하려면 투쟁 이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오래 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사람이 까만 옷으로 온 몸을 싸고 눈만 내놓고 학교에 다니면서 네가 하려는 식의 발언을 한 적이 있었어. 싸우려면 그 전에 기획을 잘 해서 멋있게 해야해. 결론적으로 지금 자신이 투쟁할 시기인지 생각할 시기인지 한 번 더 생각해봐. 또 한 가지, 지금 이유가 있어서 투쟁을 하고 싶어하는 부분도 있지만 해원이가 막 반항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반항을 하고 싶으면 해야 하지만 자신이 그런 나이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니까 그 점도 충분히 고려해서….”
곁에 있던 내게 남편의 말은 매우 보수적으로 들렸지만 한편으로 안도가 되었다. 그 말을 받아서 나는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세상에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하거든. 그러고도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으로. 또 가장 적절할 때에 행동을 해야 해. 며칠 전에 중앙청 첨탑을 제거했지? 그런데 그랬다고 일제 잔재가 어디로 사라지니? 중요한 것은 중앙청을 허문다든가 옮긴다든가 첨탑을 제거한다는 논의의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고 만들어 가는 부분이야.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야. 나는 네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네가 살고 있는 공간을 잘 관찰하고 알아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에게 여러 가지로 쐐기를 박고 있었다. 아이는 배반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위헌”이 될 일이 사방팔방에 깔려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데다가 끔찍하게 바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경기 실업학교 방화 사건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아이 뒤에서 법정 투쟁을 밀어 줄 정도로 철저한 자유주의자를 못된다. 나는 이튿날 학교에서 있을 일에 대비해서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해원아, 따지고 싶어도 너무 전제가 다를 때는 포기를 하는 것이 나아. 아무리 네가 옳다고 생각해도 서로 의사 소통이 안되면 소용이 없잖아. 독단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지.”
이야기를 끝내고 해원이와 나는 학교에 갔다. 학생 주임 교사실에 들어서니 몇몇 선생님들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한참 동안 여자인 줄만 알다가 나중에 남자인 것을 알고 놀랐다. 제일 먼저 외국에 몇 년 있었는지를 물었다.
“미국에 몇 년 있었어요? 일년요? 일년이면 금방 적응을 할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미국에 일년밖에 안 있었으면서 너무 물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외국에 간다고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보수적인 아이는 미국에 가면 더 보수적이 되고, 집중 못하는 아이는 더욱 집중을 못하고, 진보적인 사람은 더욱 진보적이 될 뿐, 사람은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이 서양물로 물들면 안되다는 생각이 박혀 있어서, 아니며 서양 것이면 사족을 못쓰던 현대사를 기억하기에 그런 의심들을 하게 되나 보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하고 선해 보이는 분이었다. “이제 까만 운동화는 신을 수 있게 되었어. 그러나 반바지는 안되고… 그런 머리는 물론 안 되지.” 나는 멀찍이 앉아 다른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부러 그 쪽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교칙을 두고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주임 선생님이 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왜 다르냐고? 너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다닐 수 있냐? (예 다닐 수 있어요.) 그렇다면 너와 말이 안 된다. 미국에서는 미국 사회 규칙이 있고 한국에 오면 여기 규칙이 있어. 집에 가면 집안 가풍이 있고 학교에 오면 학교 규칙이 있듯이… 그렇게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검정고시를 보거나, 조금만 있으면 중학교를 졸업하니까 머리를 길러도 되는 예술 고등학교에 가든지 미국에 가서 학교를 다니든지 해야지.”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학생들을 이뻐하는 모습이 역력한 교감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로 해원이를 타일렀다.
“학교에는 학교의 규칙이 있고 가정에는 가정의 규칙이 있지 않니? 미국은 미국 법이 있고 소련은 소련 법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 것이 있잖아.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사니까 특이하게 보여야 하고, 그래서 머리를 기르지, 머리 기르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가서 길러라. 대학가면 다 할 수 있다. 열심히 해서 서울대도 가고 노벨상도 타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남들과 잘 어울려 적응을 해야지. 너만 다르게 하면 되겠니?”
나는 솔직히 선생님들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그분들의 친절함과 참을성에 좀 놀라고 있었다. 중학교 교사는 아직도 할 만하다더니 사제간의 정이랄까 신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밖에서 보는 교육계의 위기가 안에 들어가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 교육 현장이 이렇게도 평온하다니! 중세의 성곽처럼 묘하게 굳어진 진공의 공간이 아닌가.
사실 이해를 하려 들면 못 할 것도 없다. 체제 유지비용이 부족해서 근근히 지탱해 가는 학교가 어떻게 구조 변화의 비용을 마련해 낼 수 있을까?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몹시 가난한 상태에 있는 교육자들에게서 변화를 감당해 낼 힘이 나올 리 없다. “아직은 아닙니다. 천천히, 천천히”라고 말하는 것말고는.
어쨌든 머리에 관한 학교의 논리는 명료했다. 예외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 미국 물이 든 것을 곧 빼고 여기에 맞추라는 것, 원하는 일은 대학가서 하라는 것,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와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대학 종착역주의가 그 기본에 깔려 있다. 인습으로의 회귀와 비순응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있는 건가? 학교의 규칙과 가정의 규칙과 사회의 규칙 해서 개별 집단에 따라 규칙은 다르다는 논리는 편리하지만 얼마나 위험한가. 그 개별 공간 사이에 생기는 괴리를 없애고 더 보편적인 원리로 행동해 가는 것이 근대적 인간의 행동 원리라고 알고 있는 내가 상식이 없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가 분열을 정상 상태로 여기는 사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해원이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었고 교장 선생님에게 한가닥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 역시 비슷한 내용의 이유로 그런 머리로는 교실에 들여보낼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해원이는 표정이 완전히 굳어서 집으로 왔고, 내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어쩌고 하면서 위로를 하려 들자 그것은 “타협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며 이번 사건은 “후퇴”와 “굴복”일 뿐이라고 했다.
오후에 학교에 갔다가 집에 전화를 해보니 누나 오기를 기다려 미장원에 갔는데, 할머니 말씀이 “아들이 오는 줄 알았더니 또 딸이 왔다. 그런데 기분은 좋은 것 같으니 다행이다”고 했다. 집에 와 보니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음날 학교 가서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왔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한 학생을 데리고 와서 머리를 그 학생처럼 자르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머리를 밀어버릴 생각을 했는지 학원 아이들과 의논을 했는데 삭발을 하면 정학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래도 밀어버리겠다고 미장원에 가더니 밀다가 생각이 바뀌어서 모히칸 컷이라는 갈 하고 왔다. 양옆을 파랗게 면도로 밀고 중간 부분만 남겨둔 머리인데 긴 머리를 세우면 펑크처럼 되는 스타일이다. 긴 머리는 묶으면 사무라이처럼 되고 매우 사나워 보인다. 그런데 앞가르마를 타면 얌전한 도토리 머리가 된다.
다음 날 또 쫓겨올 것 같아서 가슴을 졸이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저녁에 기분 좋게 돌아왔다. 교감 선생님께서 면도로 민 머리 스타일을 모르셔서 그런지 “시원하게 잘 잘랐다.”고 칭찬하셨다고 한다. 막상 교실에 가보니 아이들 중에는 머리 염색한 아이가 꽤 있더라고 한다. 일년 동안 많이 변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도 자기가 한 머리 스타일을 권해본 모양인데 그 머리를 했다가는 학교에서 야단 맞기 전에 집에서 쫓겨난다고 하더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가정의 변수라는 걸 미처 계산을 못했지.”
피시 통신 대화방에 들어가 보면서 해원이는 좀 더 사회를 알아가고 있다. 서울대 성희롱 사건의 고등법원 판결문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편지를 읽고 일일이 반박 편지를 쓰다 포기를 하고는, 피시 통신하는 사람들 중에 성차별주의자들이 더 많은 지 물었다. “글세, 비슷하겠지.” 그 대답밖에 못했다.
그러나 피시 통신 교육 관련 토론 광장에 오르는 글을 보면 해원이 같은 아이들이 적지 않다. 춘천 고등학교 최 우주 군이 오린 “학생들의 기본권을 짓밟는 학교”라는 제목의 글이나 문필상 군의 “중고생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글을 읽으면 해원이를 보는 것 같았다.
파르스름한 부분이 까매지자 해원이는 전기 면도기를 사와서 누나에게 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표시로 그는 파르스름한 빛깔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 해원아, 누가 네 마음을 모르니? 그리고 바로 그런 기억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것 아니니? 나 역시 내리지 말라는 애교머리를 열심히 내리고 다녔다. “귀 밑 일 센티미터”보다 길면 절대 안 된다는 성화에, “귀 위 일 센티미터”로 잘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학교를 다녔다는 정선이도, 학교에 가면 교복이 불편해서 수없이 꾸중을 들으면서도 늘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는 혜란이도, 실은 개성을 죽이려는 학교에 대한 저항으로 고집을 부린 것이었고, 그 작은 저항은 실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 기억이 우리를 계속해서 살아 있게 하기에 그런 기억이 없는 부모를, 교사를 가가 참으로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겠니? 억압이 더욱 교묘해져가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사람은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들일 게다.
며칠 전에 인기 있는 락 그룹의 드럼 주자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을 거의 맞으면서 보냈다고 하더라. 머리 기르는 거 때문에. 음악 하는 사람이든 누구든 무차별하게 학교 방침이라면서 학생부 선생님이 가위 갖고 다니면서 막 잘랐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 친구는 일학년 때는 잘렸는데 이학년 때는 머리를 손으로 꽉 잡고 결사적으로 저항했다더라. 자르려면 손가락이 잘릴까봐 못 건드렸다는구먼. 그 대신 손을 놓을 때까지 패는데 네 시간 내내 맞은 적도 있었단다. 몽둥이로. 그리고 나서는 선생님이 지쳐서 포기했단다.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는데 맞은 세월이 아까워서 졸업을 했다는구나. 처절한 이야기이다.
해원이 너는 네 논리와 전략 덕분인지. 누구의 말대로 교수의 자녀라는 신분이 주는 보호막 때문인지, 세상이 좋아졌기 때문인지, 아마 그 모든 것 덕분이겠지만 그 형과 비교하면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던가? “엄마는 겁도 없어. 어떻게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지?” 라던 네 말을 기억한다. 네가 꾸민 법정 투쟁을 적극 지원하지 않은 것을 두고 언젠가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이번에 기성세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아 찝찝한 마음이 없지 않다. 나는 기성 세대이고 너희 세대와 공존한다. 중요한 것은 두 세대간의 연결이며 신뢰일 것이다. 너의 독자적인 여정이 시작되고 있구나. 힘들어도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샘이깊은물' 11월호에서)
정보출처: 동원고등학교 국어과 (창의력 신장을 위한 수준별 논술 읽기 자료 모음)
전학 수속을 하면서 서울에 돌아온 것을 실감한다. 많은 서류와 일주일 동안의 기다림.
“지난 번 다니던 학교로 해 주세요. 집 앞에 있으니까요.”
“협의를 해 봐야 합니다.”
무슨 협의를 해야 할까? 관료제의 가장 큰 기능은 개인들로 하여금 수시로 무력감을 경험케 함으로써 공권력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는 걸 거다.
해원이 머리 때문에 방학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해 보면 머리를 길러 묶는 것처럼 편하고 자연스러운 머리 스타일도 없을 것이다. 내 단발머리가 자라듯이 해원이 머리도 꽤나 빨리 자라서 우리는 닮은꼴처럼 머리를 묶고 다녔다. 머리가 제법 자리를 잡아가는데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고, 공들여 기른 머리를 잘라야 하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송회 자리에서 해원이 머리 문제가 토론거리로 올랐는데, 칠십 년대 서울 명동 거리에서 머리칼을 잘린 경험이 있는 한 엔지니어는 자신이 그런 “야만적인” 두발 단속에 전혀 대항할 생각도 없이 도망만 다닌 과거를 기억해내고는 분해했다. 교환 교수로 와 있던 한 법대 교수는 강제로 교사가 머리칼을 자를 경우, 신체 침해권 조항으로 충분히 법적 사건화할 수 있지만, 자기 같으면 먼저 학급 회의를 통해 두발 자율화를 건의해 보겠다고 했다. 해원이는 “서울의 중학교 사정을 잘 모르시는군요. 학급 회의가 거의 열리지 않고요, 어쩌다 열려서 건의를 한다 해도 전체 반장 회의에서 제대로 토의가 되지 않고요. 또 토의가 되어 결정을 했다 해도 학교에서 무시하면 그만이에요”라면서 오히려 그 “순진한”교수를 가르치려 들었다.
아이는 순진하게도 학교에 자신의 논리를 이야기하면 통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당연히 법적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내겠다는 계산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권을 침해하는 것과 불필요하게 남녀를 구분하는 것에 강하게 저항을 해왔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학생 인권”을 찾는 것에 신경을 쏟아 온 해원이에게 이번 일은 참으로 의미 있고 신나는 프로젝트일 수 있었다.
나 자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중학생이 머리를 기르겠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십일 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자기 연출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문화적 창조는 개인의 자기 형성에 기초하고, 자기 형성에 중요한 것은 자기 표현과 자기 연출이다.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신체에 어떻게 자유로움이 깃들 수 있나? 자유의 자유로움은 신체의 자유로움을 기초로 하고, 실제로 신체의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은 근대 정신의 핵심이 아닌가?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신체에 부당하게 가해지는 억압은 최소한 줄여나가는 것이 이십일 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을 기르는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국 사회가 단순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로 남아 있겠다면 할 말은 없다. 회색 제복에 넥타이를 매고 공공칠 가방을 든 하급 세일즈맨들을 양성시켜서 경제 성장을 지속시키겠다면 현재와 같은 입시 위주의 교육과 중세적 통제방식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초국적 자본은 인건비가 싼 곳으로 이동하고 있고, 대기업들은 “유연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해내는 인력을 잡아라”라며 창의적인 인력을 눈을 비비며 찾고 있지 않나? 기업은 질적인 인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대학을 탓하지만, 아무리 능력 있는 대학 교수라 해도 중세적 통제 속에 길들여진 고득점자들을 창의적 인간으로 만들어낼 요술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
여전히 남녀 분반에 암기식 교육을 시키는 학교 문화의 시대착오성은 절망적이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물꼬를 터 가야 하지 않을까? 머리를 기르겠다는 사회적 발언이 현재 교육 제도에 대한 새로운 점검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일으켜 볼 만한 사건일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던 나는 막상 서울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갔을 때 해원이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상상을 하면 슬퍼졌고, 그 투사적 기질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나는 현실로 돌아와 따져 보기 시작했다. 지금이 머리 문제를 제기할 적절한 때일까? “대중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내 결론은 그런 문제를 띄우기에 좋지 않은 때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은 “미국 갔다 와서 까분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매우 감정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처리해 버릴 것이다 내 판단에, 지금 우리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만심을 한껏 부풀리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했던 문화 식민주의는 급격하게 문화 우월주의와 한민족 제국주의적으로 기울고 있고, 대중매체와 국가는 그 면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한국인은 특히 미국에 기죽어 온 과거를 억울해 한다. 그래서 “미국 놈은 미국식으로 하라지. 유서 깊은 우리는 더 나은 우리식이 있어”라면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회 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고 있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거의 모두 팔십년대식 사회 운동에 질리고, 끝없이 터져 나오는 엄청난 위기들에 놀라서 조용히 살고 싶어한다. 사적 영역에서 감각적 만족을 느끼며 살고 싶어한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외양으로 “튀는 것”,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애인과 차를 마시고 애인을 보내고는 옛 감정을 되씹어 보는 것, 이런 일들에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떠든다고 사회가 변하나? 논리 없는 시대에 논리를 만들어 시끄럽게 굴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무기력감을 더 강화하는 짓은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정의와 당위를 이야기하는 계몽주의가 버겁고, 다른 이들의 억압을 대변하겠다는 엘리트들도 볼썽사납다.
거나마 여전히 사회 운동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 머리 문제는 황당하게 다가갈 것이다. 중학생이 머리를 기르겠다고 고집한다? 그것도 미국이나 왔다 갔다 했다는 배부른 아이가?
나는 두발의 자율권을 마땅히 따냈어야 할 칠십 년대 장발족의 무기력과 팔십 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해온 이들의 봉건성에 화가 났다. 온갖 금지를 통해 사람을 옭아매는 우리나라 제도 교육의 구태의연함도 놀랍지만, 너무나 당연히 자신이 머리를 기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보는 것도 심란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규칙은 지키기 위해서 있기도 하지만 또 고쳐지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닌지, 교보 문고에 너무 자주 데리고 다닌 것은 아닌지, 아이를 너무나 과보호한 것이 아닌지 갖가지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 기르기란 이렇게 힘든 일인가?
나는 해원이에게 이런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네가 절실하게 머리를 기르고 싶다면 문제를 일으켜도 좋다. 그러나 남을 위해 하겠다면 그만둬라. 머리를 기르고 싶은 학생들이 많다면 해도 좋지만 네가 앞장을 서서는 안 될 것이다. 너는 곁에서 참모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할거다. 네가 하려는 식의 운동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런 말이 해원이에게 먹혀들 턱이 없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내가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해원이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 다녔다. 요즘 여학생 중에는 소년 같은 아이들이 많아서 해원이는 그런 여학생으로 “통과”되고 있었던 것이다. 개학이 가까워지자 할머니가 “너 이제 미장원 가야 하지 않니?”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으니까 “할머니도 참. 내부에 적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라면서 더욱 단호하게 “투쟁의지”를 굳혀 가고 있었다. 내가 제일 걱정한 것은 해원이가 머리 사건으로 크게 상처를 입고 사회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개학 전전날 나는 꽤 망설이다가 학교로 교장 선생님을 뵈러 갔다. 워낙 더워서 그런지 일년만에 뵙는 교장 선생님께서는 좀 수척해지신 듯했다. 학부모들이 교복을 입히라고 성화를 해도 끄덕 없이 교복 자율화를 고수하고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려고 사방으로 애를 쓰시는 분이다. 나는 해원이가 미국에서 유익하고 즐거운 한해를 보냈으며, 다시 이 학교로 전학을 올 것이라는 것과 그 동안 머리가 길었는데 자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로 운을 떼었다. 교장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일은 부모님이 알아서 못하십니까? 혼자 머리 기르게 해 줄 수는 없지요. 실은 아이가 괴롭습니다. 별다르게 하고 다니면 따돌리고 자신이 괴로워서 못 다닙니다.”
나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요새 아이들이 “튀는 것”을 좋아하고, 또 개중에는 해원이처럼 따돌려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아이가 적지 않음을 말씀드릴까 하다가 가만히 있었다. 아이가 단순히 머리를 기르고 싶어서라기보다 다른 의도가 그 속에 담겨 있으며, 이것을 기화로 규칙을 바꾸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지 예외 조항을 두어 달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안 했다.
“요새는 여자애 머리도 묶지 못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외모에 워낙 신경을 써서 더 엄하게 다루지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이다. 요즘 대다수의 젊은 아이들은 온통 외모 꾸미기와 전화 호출기와 이성 친구 생각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외국에서 온 이들도 이구동성으로 한국 젊은이들이 왜 그리 외모에 집착하느냐고 물어온다. 사회학적 분석을 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장 선생님의 고충을 내가 왜 모르랴? 특히 중학교 삼학년들의 가출은 급격히 늘고 있으며, 가리봉동의 가출촌 소녀들은 손님 접대가 적성에 맞는다면서 찾으러 온 담임 선생님을 오히려 위로하여 돌려보내기도 한다는 세상이니, 이런 면에서 관리 불가능한 상황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요즘 주유소에서 “즐겁게” 일하는 집나온 중학생들을 보아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르는 ‘교실 이데아’를 들어도, 청소년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나는 며칠 전에 딸아이 친구들이 부르던 “디 제이 덕”이 부른 노래가 생각났다. 제목이 ‘성수대교’이던가?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 그 어떤 변명, 핑계, 용납할 수 없다. 무너진 다리에 끊어져 버린 꿈, 무너져 버린 사랑, 무너져 버린 믿음, 어른들의 치졸함에 누명을 쓰고 가버린 친구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아 천구백구십사년 부실 공사 추방 원년 천구백구십사년”
머릿속은 성수대교를 그리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 정도였다.
“집에서 다시 한 번 말을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을 텐데 선생님께서 잘 말씀해 주세요.”
아이들 학교만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몸짓도 공손해진다. 자식이 웬수라던가? 학생 지도는 교장 선생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감과 학생 주임 선생님도 계시니 함께 의논해서 해 보겠다는 말씀을 들으며 교장실을 나왔다. 학교라는 거대한 통제 관리 체제는 너무나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가슴을 짓눌렀다.
방학이라 학교에는 당직 선생님 한 분만 계셨다. 미술을 가르치는 여선생님이신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곁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친근한 감도 들고 답답한 김에 아이 머리 이야기를 꺼냈더니 매우 안타까워했다. 작년에 미국서 오래 살다온 여학생이 있었는데 귀걸이를 하고 와서 겨우 설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모도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학교 규칙에 문제를 제기해 왔지만 나중에는 아이도 잘 적응해 가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 오면 이곳 규칙을 따라야 한다.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아이들도 다 하고 싶어해서 안 된다. 대학 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을 했지요. 남자 아이 머리 기르는 것은 아직은 안돼요.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천천히 변하고 있지요. 그냥 미국에 두고 오시지…. 그곳에서 공부를 잘 하고 있었다면 왜 데리고 오셨어요? 그곳에서 자유롭게 지내다 오면 이곳 생활은 힘들 거예요.”
자식이 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세계화를 외치는 이 땅에서, 또 많은 아이들이 중학교 삼학년에 스스로 해외 유학을 떠나는 마당에 매우 지당한 제안이기도 했다. 자유를 원하는 아이. 개성을 존중받고 싶어하는 아이는 이 땅을 떠나라!
실제로 해원이는 그곳에서 일년을 지내면서 무척 행복해 했다. 방학이 없으면 좋겠다는 정도로 엉뚱한 질문을 하는 엉뚱한 질문을 하는 학생이 사랑 받고, 체벌이 없는 학교, 자신이 묻는 모든 질문이 자기만이 하는 질문이 아닌 학교, 양성적인 아이들이 많고, 남자와 여자가 옷 바꿔 입고 오는 날이 있는 학교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해원이는 그런 재미있는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그곳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두 학교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챈 해원이는 궁리 끝에 한국의 아이들과 미국의 아이들을 이년씩만 바꾸어 보면 모든 교육 문제가 해결될 것인데 그것이 현실로는 불가능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미국은 유월에 졸업이라 아이는 그곳에서 졸업식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이는 더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을 두고 슬퍼했다. 멍청하게 소파에 누워 있다가 “나는 왜 한국서 태어났을까?”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또하나의 문화” 친구들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간다고 덧붙였다. 그래, 땅과의 인연, 자신을 길러주고 사랑해준 사람들과의 인연을 잘 맺고 좋게 이어 가야지.
해원이는 긴 머리 스타일을 유지하려 하는 이유를 두고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정리한 것 같았고, 머리를 묶으면 “눈썹을 덮으면 안되고 귀를 덮지 말며 어깨에 닿지 않는 단정한 머리”를 요구하는 교칙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에 재판을 걸면 교칙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마침 “샘이 깊은 물”에서 원고 청탁을 하자 글을 쓰면 “투쟁”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하루 꼬박 앉아서 글을 써냈다. 학원 아이들과 의논도 하며 부딪치면 쉽게 될 것 같은지 점점 더 의기양양해 갔다. 어쩌면 그 아이는 완전히 “돈키호테”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학교 가기 전날 아이는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 아버지는 전날에 “샘이 깊은 물”에 보낼 해원이의 글을 읽었으므로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 글에서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느낌을 받아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머리 문제를 계기로 해 자기의 생각을 풀어내고 글로 정리해 본 것은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투쟁을 하는 것에서 존재를 실감한다”는 식의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입시를 눈앞에 둔 중학교 삼학년으로서 일년을 놀다 와서 머리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차분히 따져 보라고 했다.
아이 아버지는 덧붙여 해원이가 중학교 입학 때부터 신경을 써온 체벌이나 교내 폭력, 아니면 학습 방식을 바꾸는 방안들에 문제 제기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투쟁을 하려면 투쟁 이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오래 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사람이 까만 옷으로 온 몸을 싸고 눈만 내놓고 학교에 다니면서 네가 하려는 식의 발언을 한 적이 있었어. 싸우려면 그 전에 기획을 잘 해서 멋있게 해야해. 결론적으로 지금 자신이 투쟁할 시기인지 생각할 시기인지 한 번 더 생각해봐. 또 한 가지, 지금 이유가 있어서 투쟁을 하고 싶어하는 부분도 있지만 해원이가 막 반항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반항을 하고 싶으면 해야 하지만 자신이 그런 나이에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니까 그 점도 충분히 고려해서….”
곁에 있던 내게 남편의 말은 매우 보수적으로 들렸지만 한편으로 안도가 되었다. 그 말을 받아서 나는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세상에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하거든. 그러고도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으로. 또 가장 적절할 때에 행동을 해야 해. 며칠 전에 중앙청 첨탑을 제거했지? 그런데 그랬다고 일제 잔재가 어디로 사라지니? 중요한 것은 중앙청을 허문다든가 옮긴다든가 첨탑을 제거한다는 논의의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고 만들어 가는 부분이야.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야. 나는 네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네가 살고 있는 공간을 잘 관찰하고 알아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에게 여러 가지로 쐐기를 박고 있었다. 아이는 배반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위헌”이 될 일이 사방팔방에 깔려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데다가 끔찍하게 바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경기 실업학교 방화 사건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아이 뒤에서 법정 투쟁을 밀어 줄 정도로 철저한 자유주의자를 못된다. 나는 이튿날 학교에서 있을 일에 대비해서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해원아, 따지고 싶어도 너무 전제가 다를 때는 포기를 하는 것이 나아. 아무리 네가 옳다고 생각해도 서로 의사 소통이 안되면 소용이 없잖아. 독단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뿐이지.”
이야기를 끝내고 해원이와 나는 학교에 갔다. 학생 주임 교사실에 들어서니 몇몇 선생님들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한참 동안 여자인 줄만 알다가 나중에 남자인 것을 알고 놀랐다. 제일 먼저 외국에 몇 년 있었는지를 물었다.
“미국에 몇 년 있었어요? 일년요? 일년이면 금방 적응을 할겁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미국에 일년밖에 안 있었으면서 너무 물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외국에 간다고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보수적인 아이는 미국에 가면 더 보수적이 되고, 집중 못하는 아이는 더욱 집중을 못하고, 진보적인 사람은 더욱 진보적이 될 뿐, 사람은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이 서양물로 물들면 안되다는 생각이 박혀 있어서, 아니며 서양 것이면 사족을 못쓰던 현대사를 기억하기에 그런 의심들을 하게 되나 보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하고 선해 보이는 분이었다. “이제 까만 운동화는 신을 수 있게 되었어. 그러나 반바지는 안되고… 그런 머리는 물론 안 되지.” 나는 멀찍이 앉아 다른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부러 그 쪽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교칙을 두고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주임 선생님이 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왜 다르냐고? 너 원피스 입고 하이힐 신고 다닐 수 있냐? (예 다닐 수 있어요.) 그렇다면 너와 말이 안 된다. 미국에서는 미국 사회 규칙이 있고 한국에 오면 여기 규칙이 있어. 집에 가면 집안 가풍이 있고 학교에 오면 학교 규칙이 있듯이… 그렇게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검정고시를 보거나, 조금만 있으면 중학교를 졸업하니까 머리를 길러도 되는 예술 고등학교에 가든지 미국에 가서 학교를 다니든지 해야지.”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학생들을 이뻐하는 모습이 역력한 교감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로 해원이를 타일렀다.
“학교에는 학교의 규칙이 있고 가정에는 가정의 규칙이 있지 않니? 미국은 미국 법이 있고 소련은 소련 법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 것이 있잖아.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사니까 특이하게 보여야 하고, 그래서 머리를 기르지, 머리 기르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가서 길러라. 대학가면 다 할 수 있다. 열심히 해서 서울대도 가고 노벨상도 타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남들과 잘 어울려 적응을 해야지. 너만 다르게 하면 되겠니?”
나는 솔직히 선생님들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그분들의 친절함과 참을성에 좀 놀라고 있었다. 중학교 교사는 아직도 할 만하다더니 사제간의 정이랄까 신뢰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밖에서 보는 교육계의 위기가 안에 들어가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 교육 현장이 이렇게도 평온하다니! 중세의 성곽처럼 묘하게 굳어진 진공의 공간이 아닌가.
사실 이해를 하려 들면 못 할 것도 없다. 체제 유지비용이 부족해서 근근히 지탱해 가는 학교가 어떻게 구조 변화의 비용을 마련해 낼 수 있을까?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몹시 가난한 상태에 있는 교육자들에게서 변화를 감당해 낼 힘이 나올 리 없다. “아직은 아닙니다. 천천히, 천천히”라고 말하는 것말고는.
어쨌든 머리에 관한 학교의 논리는 명료했다. 예외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 미국 물이 든 것을 곧 빼고 여기에 맞추라는 것, 원하는 일은 대학가서 하라는 것,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와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대학 종착역주의가 그 기본에 깔려 있다. 인습으로의 회귀와 비순응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있는 건가? 학교의 규칙과 가정의 규칙과 사회의 규칙 해서 개별 집단에 따라 규칙은 다르다는 논리는 편리하지만 얼마나 위험한가. 그 개별 공간 사이에 생기는 괴리를 없애고 더 보편적인 원리로 행동해 가는 것이 근대적 인간의 행동 원리라고 알고 있는 내가 상식이 없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가 분열을 정상 상태로 여기는 사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해원이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었고 교장 선생님에게 한가닥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 역시 비슷한 내용의 이유로 그런 머리로는 교실에 들여보낼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해원이는 표정이 완전히 굳어서 집으로 왔고, 내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어쩌고 하면서 위로를 하려 들자 그것은 “타협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며 이번 사건은 “후퇴”와 “굴복”일 뿐이라고 했다.
오후에 학교에 갔다가 집에 전화를 해보니 누나 오기를 기다려 미장원에 갔는데, 할머니 말씀이 “아들이 오는 줄 알았더니 또 딸이 왔다. 그런데 기분은 좋은 것 같으니 다행이다”고 했다. 집에 와 보니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음날 학교 가서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왔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한 학생을 데리고 와서 머리를 그 학생처럼 자르라고 일러주었다 한다. 머리를 밀어버릴 생각을 했는지 학원 아이들과 의논을 했는데 삭발을 하면 정학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래도 밀어버리겠다고 미장원에 가더니 밀다가 생각이 바뀌어서 모히칸 컷이라는 갈 하고 왔다. 양옆을 파랗게 면도로 밀고 중간 부분만 남겨둔 머리인데 긴 머리를 세우면 펑크처럼 되는 스타일이다. 긴 머리는 묶으면 사무라이처럼 되고 매우 사나워 보인다. 그런데 앞가르마를 타면 얌전한 도토리 머리가 된다.
다음 날 또 쫓겨올 것 같아서 가슴을 졸이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저녁에 기분 좋게 돌아왔다. 교감 선생님께서 면도로 민 머리 스타일을 모르셔서 그런지 “시원하게 잘 잘랐다.”고 칭찬하셨다고 한다. 막상 교실에 가보니 아이들 중에는 머리 염색한 아이가 꽤 있더라고 한다. 일년 동안 많이 변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도 자기가 한 머리 스타일을 권해본 모양인데 그 머리를 했다가는 학교에서 야단 맞기 전에 집에서 쫓겨난다고 하더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가정의 변수라는 걸 미처 계산을 못했지.”
피시 통신 대화방에 들어가 보면서 해원이는 좀 더 사회를 알아가고 있다. 서울대 성희롱 사건의 고등법원 판결문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편지를 읽고 일일이 반박 편지를 쓰다 포기를 하고는, 피시 통신하는 사람들 중에 성차별주의자들이 더 많은 지 물었다. “글세, 비슷하겠지.” 그 대답밖에 못했다.
그러나 피시 통신 교육 관련 토론 광장에 오르는 글을 보면 해원이 같은 아이들이 적지 않다. 춘천 고등학교 최 우주 군이 오린 “학생들의 기본권을 짓밟는 학교”라는 제목의 글이나 문필상 군의 “중고생은 인간도 아니다.”라는 글을 읽으면 해원이를 보는 것 같았다.
파르스름한 부분이 까매지자 해원이는 전기 면도기를 사와서 누나에게 밀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표시로 그는 파르스름한 빛깔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 해원아, 누가 네 마음을 모르니? 그리고 바로 그런 기억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것 아니니? 나 역시 내리지 말라는 애교머리를 열심히 내리고 다녔다. “귀 밑 일 센티미터”보다 길면 절대 안 된다는 성화에, “귀 위 일 센티미터”로 잘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학교를 다녔다는 정선이도, 학교에 가면 교복이 불편해서 수없이 꾸중을 들으면서도 늘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는 혜란이도, 실은 개성을 죽이려는 학교에 대한 저항으로 고집을 부린 것이었고, 그 작은 저항은 실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 기억이 우리를 계속해서 살아 있게 하기에 그런 기억이 없는 부모를, 교사를 가가 참으로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겠니? 억압이 더욱 교묘해져가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사람은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들일 게다.
며칠 전에 인기 있는 락 그룹의 드럼 주자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을 거의 맞으면서 보냈다고 하더라. 머리 기르는 거 때문에. 음악 하는 사람이든 누구든 무차별하게 학교 방침이라면서 학생부 선생님이 가위 갖고 다니면서 막 잘랐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 친구는 일학년 때는 잘렸는데 이학년 때는 머리를 손으로 꽉 잡고 결사적으로 저항했다더라. 자르려면 손가락이 잘릴까봐 못 건드렸다는구먼. 그 대신 손을 놓을 때까지 패는데 네 시간 내내 맞은 적도 있었단다. 몽둥이로. 그리고 나서는 선생님이 지쳐서 포기했단다.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는데 맞은 세월이 아까워서 졸업을 했다는구나. 처절한 이야기이다.
해원이 너는 네 논리와 전략 덕분인지. 누구의 말대로 교수의 자녀라는 신분이 주는 보호막 때문인지, 세상이 좋아졌기 때문인지, 아마 그 모든 것 덕분이겠지만 그 형과 비교하면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였던가? “엄마는 겁도 없어. 어떻게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지?” 라던 네 말을 기억한다. 네가 꾸민 법정 투쟁을 적극 지원하지 않은 것을 두고 언젠가 나는 후회하지 않을까? 이번에 기성세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아 찝찝한 마음이 없지 않다. 나는 기성 세대이고 너희 세대와 공존한다. 중요한 것은 두 세대간의 연결이며 신뢰일 것이다. 너의 독자적인 여정이 시작되고 있구나. 힘들어도 즐거운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샘이깊은물' 11월호에서)
정보출처: 동원고등학교 국어과 (창의력 신장을 위한 수준별 논술 읽기 자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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