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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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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희망’의 새해가 밝아온다는 수사를 접하게 됩니다.
2010년을 마감하면서 역시 우리는 연말특집 뉴스에서 보도하는
10대 뉴스를 볼 수 있었고, 희망으로서 새해를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Bad News들로부터
미래의 희망을 도출하는 식은 왜인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죠.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희망을 말하지만 연말특집 뉴스에서는 또다시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정리하게 될 공산이 크지 않을까요?
문득 희망이라는 건 절망의 표정을 가린
가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표정에 비장함이 묻어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싶습니다.
‘다사다난’했던 과거로부터 ‘희망’을 염원하는 현상은 과연 무엇의 상징일까요?
우리가 만약 모든 것에 대해 만족한 상태에 도달해서도
희망이란 단어를 갈구하게 될 것인지 상상해본다면, 역설적이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과거, 현재에 가진 절망감의 발현이라는 답을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 세상은 희망론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악명높은? 2012년의 종말론에 따른다면,
우리가 2011년을 맞이함은 D-1의 카운트다운에 도달한 것뿐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이렇듯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과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공존합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우리의 선조들 또한
불확실한 미래(우리들의 현재)를 맞이하며 밝음과 어둠을 보았을 것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미디어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진보의 시기에,
오히려 ‘빅브라더’에 의한 대중의 통제라는, 종말론적 예언을 암시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이, 오로지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불안,
미래에 대한 불확실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해야만 할까요? 그 뿐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다시 <1984>의 예를 들면, 미디어를 장악한 빅브라더에 의해 통제되는
대중의 암울한 풍경을 제시한 조지 오웰의 절망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른 미디어의 발달은 오히려 대중이 주체가 되어
빅브라더를 감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절망이,
오로지 미래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도 정답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설 <1984>가 제기했던 미디어에 대한 비판은
당시의 기술예찬론자들에 대한 경고로 작용하여
종말론이 실현되지 않도록 방어막이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디어 사회에 대해
폐기될 수 없는 논점을 제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관점이 희망적 미래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죠.
이러한 면을 볼 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고 사는 인간은,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부터 종말을 경고하고,
절망의 시대로부터 희망의 원천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겠죠.
2012년이 가까워질 시각에, 어떤 이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뿐이지만,
어떤 이는 미래를 위한 대체에너지 산업에 대한 주식투자를 계획하고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2012년이 무사히 지난 시각에, 어떤 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지만,
어떤 이는 또 다른 종말의 위험을 우리에게 경고해 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질적 희망을 이끌어내는 힘은, 희망을 위한 희망,
절망을 위한 절망이 아닌, 현실을 차분히 관찰하고 실천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희망론과 절망론으로부터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에 대하여,
세상 참 많이 변했구나라고 느끼는 99%의 잉여적 인간이 아닌,
미래를 이끌어가는 1%의 창의력,
통찰력을 가진 인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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